진부한 연애 이야기 하나 들려 드릴까요?
이건 뭐 소설도 뭣도 아닌, 그냥 어느 시골 다방 금붕어 수족관 옆자리 우중충한 소파에 머리가 푹 파묻히게 비겨 앉아서는, 별로 재미있지도 않는 얘기에 깔깔대며 호들갑스러운 레지 아가씨의 허옇게 드러난 허벅지를 주무르며, 그래도 제 딴엔 사뭇 진지한 양 씨부렁거리듯이 해대는, 그저 그렇고 그런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올시다.
그 다방 레지는 참 도저한 능력을 갖고 있습디다. 눈은 '개그콘서트' 가 유선으로 나오는 TV화면에 가 있고, 귀는 내 시답잖은 이야기를 듣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머리의 신경은 자신의 허벅지에 가 있는 겁니다.
TV에서 웃을 때도 따라 웃고, 내 이야기가 웃길 때도 또 웃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내 손이 좀 욕심을 부려 그녀 허벅지 안쪽으로 조금 깊숙이 들어갈 낌새라도 보이면 슬쩍 다리를 꼬며 방어하는데도 소홀하지 않더군요.
백수생활에 이골이 난 나는 덕분에 기타를 제법 둥당거릴 줄 압니다. 한데 기타 코드 짚는 데 신경을 쓰면 노래가 안 되고, 노래를 좀 멋들어지게 부르려고 하면 기타가 슬그머니 시르죽어 서리병아리 졸듯 하는데, 그녀는 어떻게 그렇게 감각을 여러 군데로 분산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지 참 불가사의합니다.
내가 하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다방레지입니다. 흔히 차순이라고도 하는데 사실 그렇게 점잖게 지칭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냥 우리는 다방기집애, 또는 다방년이라고 그러지요.
한때 나는 이 다방레지들을 몹시 사랑했어요. 누구를 특히 마음 둔 것은 아니라는 걸 저와 같은 부류의 남자들은 잘 알 겁니다. 사실 말이 좋아 사랑이지 시쳇말로 껄떡댄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지요.
직업도 없고, 일도 하기 싫고, 시간은 남고, 그래도 제법 용돈은 어서 생기고, 그런데다 여자는 궁박하고. 그러니 시간 때우기 좋고, 여자, 그것도 넓적다리를 흐벅지게 드러낸 미니스커트의 아가씨들이 있는데다가 운 좋으면 역시 나 같은 부류의 또다른 놈팡이들과의 친분도 쌓아 가끔은 공짜 커피도 얻어먹는 수도 생기는 다방이라는 그곳, 거기에 부나방처럼 파닥이며 맴도는 그 여자들은 내게는 더할 수 없이 매력적인 거지요.
참 많이도 들락거렸어요. 우리나라는 웬 다방이 그렇게 많은 겁니까. 좀 과장해서 한집 건너 다방, 세 집 건너 교회건물이지요. 근데 시골로 가면 짜장 다섯 집 건너 다방입니다. 요즘엔 전부다 핸드폰들이 있어서 들판에서 일을 하다가도 전화기 꺼내 커피 배달시키는 세태입니다. 사름이 잘 돼 새파란 들판 가운데로 하얀 플레어치마 하늘거리며 걸어가는 다방레지는 처음엔 아주 진풍경이더니 이젠 그것도 눈에 익어 자연스런 일상이 되었습니다.
이야기가 옆길로 샜습니다. 요점은 우리 또래의 젊은 사내들은 너나없이 한때는 이 다방문화에 맛을 들였고, 그 중 몇몇은 철이 안 들어 나이 서른이 코앞에 있을 때까지도 여전히 그 참새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한다는 것이고, 내가 바로 그 놈이라는 겁니다.
백수인 주제에 돈 참 많이도 갖다 바쳤어요 전국의 다방에다가요. 그게 만약 농협이었더라면 지금쯤 기천만원 통장에 쌓여 있을지도 모르지요. 민망한 고백이지만 그동안 관계한 여자들도 부지기수고요. 사실 그렇게 해 놓고도 아직 거시기에 염증이 나거나, 또는 불의의 여난을 겪지 않았다는 게 신기하고 대견한 일이에요.
그런 사내입니다 내가.
그런데 오늘밤은 기분이 착잡합니다. 왠지 모르게 허무하고, 사는 게 부질없고 속절없이만 느껴집니다. 계절 탓일까요? 가을이 다가왔어요. 그렇게도 기승을 부리던 모기들도 사라지고 나니 마음껏 문을 열어 놓았지요. 밤바람이 아주 서늘해 오싹 닭살이 돋습디다. 내가 세 들어 사는 집 앞마당에 오동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그게 벌써 누렇게 퇴색해 가고 있고 잎 하나는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걸 보니 괜히 센티해지고 울컥 쓸쓸해지지 뭡니까.
한데 겨우 그것 가지고 이렇게 기분이 착잡하고 허우룩한 건 분명 아닐 테지요. 예 아닙니다.
사실은 그런 헙헙한 기분만은 아닙니다. 가슴 한쪽엔 뿌듯하고 속시원한 감정도 그에 못지않게 가득한걸요.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몰라 그저 착잡하다고 한 겁니다.
오늘 결심했어요. 이젠 다방엘 가지 않을 겁니다. 이젠 나도 착실히 돈을 벌어 장가도 가고 아빠도 되고 싶습니다. 일자리 좀 알아보고 조만간 이 D읍을 떠날 거예요. 이젠 철이 들었다고요? 예 제 생각에도 그래 보입니다. 그런데 이게 일시적인 충동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어제 오늘 아름다운 연인을 보았는데 그 기분에 휩쓸린 게 아니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어제도 해수욕장에 나갔더랬습니다. 철이 지난 바닷가는 적요하기 마련입니다. 더군다나 여름 한철 수많은 사람들이 왁시글대던 뒤끝은 한층 적막하기만 합니다. 나는 그 고즈넉하고 한산한 풍정이 좋아 얼마 전부터 이 바닷가를 찾기 시작했어요.
하루 일과는 날마다 같습니다. 늦은 아침으로 라면을 먹고 부시시한 머리를 하고서는 무릎 튀어나온 감색 추리닝에다 하얀 체크무늬 남방을 입고 읍내 거리를 어슬렁거리다가 다방 두어 군데 들러 출근도장 찍듯이 주방 이모와 시시덕거리다가 다시 거리를 어슬렁거리면서 못 보던 차순이 아가씨가 눈에 띄면 음흉한 호기심이 일어 어느 다방에 있는 아가씨냐고 물어 보고는 내일 놀러 가겠다는 뒷말을 던지고, 그러고는 농협 옆댕이를 돌아 공용버스터미널로 갑니다.
거기 칠 벗어진 나무의자에 앉아 이 사람 저 사람 구경하다가는 이런 소읍에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은 한껏 세련된 여자라도 눈에 띄면 음충스런 눈길로 그 여자의 온몸을 훑어 내리다가 허리께쯤 와서는 한참이나 머물러 옷 속에 감춰진 허리선이나 둔부, 치골을 상상하며 흡족해 하곤 하지요. 그리고는 매점 부스 옆 덕지적지 때가 엉긴 구저분한 쓰레기통에 구기박질린 스포츠신문을 꺼내 첫 면부터 한 면도 빼지 않고 봅니다. 그러고 나서 거기 해수욕장으로 가는 거지요.
나만 그런 게 아니고 이곳 D읍은 읍 자체가 이렇듯 단조롭고 따분하기 그지없습니다. 사람들은 표정이 없습니다. 유쾌해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불쾌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앞으로의 희망도 없어 보이고 그냥 아무 의미 없이 사는 사람들 같습니다. 읍 전체가 다 이 모양이에요. 어제나 그제나 그저 그렇게 하루를 맞고 보내는, 죽은 도시 같기도 합니다.
해수욕장에서 난 그저 시간만 죽입니다. 한낮은 아직도 뙤약볕이 뜨거워 잠깐 모래사장을 어정거리다가 솔숲으로 들어가 낮잠을 자는 게 내가 하는 일이지요.
이 바닷가는 정말 아름다운 해수욕장입니다. 우묵하게 만으로 둘러싸인 백사청송, 오른쪽 시선 끄트머리에 눈곱만큼 쬐끄만 여 하나 있을 뿐 서해바다에는 드물게 일망무제로 탁 트인 수평선, 멀리 배래 하늘엔 뭉게구름이 떠 있고, 소금을 머금은 바람은 내 겉살을 거무스름하게 어루만지고, 쇠제비갈매기는 일없이 떠서 끽끽대다가 싫증나면 백사에 내려와 종종거리며 염낭게를 쪼고, 구죽 덮인 갯바위에서 밤게가 서로 얼러 짝짓기에 정신없고.
그러기에 이 조그맣고 따분하기만 한 D읍의 이름은 몰라도 해수욕장은 유명해서 여름 한철이면 이 소읍이 그나마 왁시글 복작대는 것이지요.
어제도 나는 솔숲 벤치에 앉아 바다를 보고 있었지요. 그게 따분해지면 드러누워 잠을 자곤 했거든요. 역시나 바닷가는 한적했습니다. 누가 철지난 이곳을 올 리 있겠습니까.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가끔 찰싹 들러붙어 한몸이 된 젊은 연인이 거닐다 가거나 이 동네 건달 두엇이 입건 쌍소리로 장난질치다 소주병 하나 남겨 놓고 가기라도 했건만 이제는 그들도 오지 않습니다.
그래도 어제는 좀 손님이 있었어요. 조무래기들이 재잘거리며 백사에 나오더니 모래에 엎드려 성을 만들더라구요. 물이 점점 빠지기 시작했어요. 꼬마들은 내기라도 했는지 조금씩 멀어져 가는 썰물을 따라 기를 쓰고 성을 쌓아 나갔어요. 성은 비뚤배뚤 모양없이 그래도 제법 길게 뻗어 나갔어요. 그걸 보다가 실코가 나서 나는 예외없이 의자에 길게 누워 잠을 잤지요.
눈을 떠 보니 바닷물은 아주 멀리 나가 있었어요. 아이들도 언제 자취를 감추고 없더군요. 녀석들이 남겨 놓은 모래성들만 바다를 향해서 볼품없이 뱀처럼 늘어져 기어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일어나서 바다로 나갔어요. 이젠 집으로 돌아갈 순서지요. 아이들이 쌓은 모래성을 발로 심드렁하게 몇 번 짓뭉개고 돌아서다가 나는 모래에 쪼그리고 앉았어요.
어차피 집에 가 봐야 할 일도 없고, 오늘은 돈도 없어 저녁에 다방에도 갈 처지가 안됐습니다. 그래 쪼그리고 앉아 아이들이 한 것처럼 나도 모래에 손을 우비어 넣고 성을 쌓기로 했습니다. 나는 아이들보다 훨씬 잘 만들 자신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그것도 실코가 나 이젠 가려고 일어섰습니다. 그 때 나는 어찔, 어지러웠습니다. 갑자기 일어난 탓에 현기가 나서도 아니고, 아이들보다 잘 만들 거라 자신했는데 보니 내가 쌓은 모래성 역시 아이들 것만큼 비뚤배뚤하기 마찬가지여서도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까부터 내 하는 꼴을 다 보고 있었는지도 모를 두 사람은 그러나 내 쪽으로 오려는 길이었나 본데 방향을 틀어 숲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민망하고 쪽팔리고 화끈거렸는지 모릅니다. 남자가 뭐 그것 때문에 그리 쪽팔려 하느냐고요?
그 두 사람은 하나는 남자요 하나는 여자로, 사실은 내가 다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더 밝힌다면 남자는 근철이라고 한때는 같은 공사장에서 절친하게 사귀던 작자였고, 여자는 아름이라고 하는 다방여자예요.
더 까발릴까요? 실은 그 여자 아름이는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근사를 모으던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근철이라는 놈과 저렇듯 애인이 돼 버린 겁니다. 그러니 두 사람을 대하는 내 심정이 어떻겠어요. 그런 놈이 할 일없이 백사장에 엎드려 그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걸 두 사람한테 보였으니 내가 어찌 쪽팔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두 사람도 급히 방향을 틀어 숲으로 숨어 버린 거구요. 다정스럽게도 남자가 여자를 업고 있더군요.
그들과는 거의 달포만에 조우하는 겁니다. 그들이 미리 피해 버리는 바람에 어색한 만남을 갖지 않게 한 게 고맙지 않은 건 아니나 생각해보면 일면 괘씸하기도 한 행투였어요. 근철이 놈과 나와는 아주 절친해서 전세방을 같이 얻어 살자는 이야기까지도 나눴던 놈입니다. 아름이 일로 이상한 관계가 형성되어 거기까지는 가지 못하고 말았지만 사실 그 자가 나를 내댈 이유는 없는 거거든요. 무슨 원수진 것도 아니고, 오랜만에 봤으면 반가우면 반가웠지 그렇게 허둥지둥 피하다니요. 아름이 년도 그래요. 진심이든 아니든 사나이 자존심 욱여넣고 사랑고백까지 했고, 그것 이전에 제 단골손님으로 돈깨나 갖다 바쳤던 사람을 그래 그렇게 대해도 되는 겁니까?
어쨌거나 반가움, 수치, 패배감, 서운함, 민망함 이런 잡동사니 감정들이 한데 뭉키어 귀살머리스런 몸을 끌고 그곳을 떠나오긴 했지만 기분 참 엿 같습디다.
내가 그 아름이라는 다방아가씨를 안 게 벌써 일 년이 넘었지요 아마. 이 D읍에 오기 전엔 대전에서 살았더랬어요. 한 반 년 살았는데 내가 붙임성이 좀 있는 탓인지 그리 짧은 기간에도 제법 친구를 사귀는 재주가 있어 낯선 곳에서도 늘 외롭지 않게 어울리기를 좋아했는데 내가 사귀는 친구들이야 물론 이렇다 하게 잘 나가는 친구는 드물었어요. 끼리끼리 노는 법이니까요. 그치들도 다방 좋아하고 당구장 좋아하고, PC방에 가서 게임하는 것 좋아하는, 뭐 그저 그런 데데한 친구들이지요.
그래도 나는 그치들에 비하면 그 중 세련되고 지적인 인텔리에 속한 다고 봐야지요. 실은 나는 시인이거든요. 물론 등단도 했구요. 그리 유명한 잡지는 아니지만 정식으로 공모해서 당당히 당선했다구요. 상금도 받고 말구요, 십만 원이나 받았지요. 물론 들어간 돈이 더 많긴 했지만 그 이야기는 이따가 하도록 하구요. 아무튼 그런 이유로 나는 우리 떨거지 사이에서 목 좀 세우는 존재로 쉽게 그들과 어울려 놀곤 했지요.
그러니까 대전에서도 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려 지냈는데 어쩌다가 서해 쪽으로 회나 먹으러 가자는 말이 나오더니만 또 어찌어찌 그럼 여자를 동반하여 쌍쌍이 가자는 데에까지 의논을 짓고 말았습니다.
빌어먹을 놈들! 그러면 애인 없는 놈은 오지도 말라는 건가. 하긴 그 떨거지들이야 여자 하나 꿰차고 다니는 건 기본으로 아는 부류들이니 애인 없는 빙충이가 있으리라는 사려는 아예 필요치 않았지요.
헌데 그런 빙충이가 있었네요. 내가 바로 빙충이였어요. 나는 쓰게 쩍 입맛을 다셨지만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었지요. 내가 누굽니까. 다년간 새앙쥐 마냥 들락거리며 돈을 갖다 바친 다방이 있잖아요. 그 많은 기집애들이 다 애인인데요. 돈만 찔러 주면 아쉽지 않게 하룻밤 잠도 잘 수 있는 게 걔네들 아니겠어요.
그래 거금을 주고 데려갔던 애가 바로 아름이라는 그 레지였던 겁니다. 이른바 티켓이라는 걸 끊은 거지요.
티켓! 현대문화의 없어져야 할 한 곁길이겠지만 그걸 마음대로 누린 놈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몸입니다. 어딜 가나 돈만 있으면 불러낼 수 있어요. 어디 지방을 여행하다 잠을 자러 여관에라도 들어가면 주인아줌마한테 반드시 한마디 해야 됩니다. "여자 필요 없어요" 그러지 않으면 꼬질꼬질한 요 위에 누워 TV를 보고 있자면 낯선 여자의 방문을 받습니다. 여관주인이 알아서 모시는 거지요.
여관방에는 재떨이가 있고, 곁들여 성냥이 필수로 구비돼 있습니다. 예외없이 다방 선전용이에요. 보통, 커피는 한 잔은 배달이 안 됩니다. 고작 천오백 원짜리 한잔을 시키는 사람도 없구요. 하지만 여관에서는 한잔 주문도 가능합니다. 아니 가능하다기보다 오히려 환영이고 백이면 백 다 한잔짜리지요. 커피를 주문하는 게 아니라 여자를 부르는 거니까요.
커피 한잔 시키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어느 소도시의 원룸에 살 때는 이런 것도 봤습니다. 원룸이라고 해야 낡고 누추하기 이를 데 없는 건물인데다 자리한 데도 변두리 허허벌판에 덩그마니 홀로 선, 주위는 잡초가 무성하고 건축 폐자재들이 너더분하게 널려 있어 밤낮 암내 풍기는 고양이들이 터를 잡고서 쑤석대고, 밤이면 불량 학생들이 꼬이기 딱 좋은 그야말로 우범지역이라 할 만한 곳이어서 해가 떨어지면 서둘러 인적이 끊기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구경거리가 제법 있는 곳입디다 거기가. 밤에 하릴없이 창문을 열고 저만치 야경을 보고 있노라면 차 한대가 스르르 건물 앞에 와 멈춥니다. 물론 원룸의 다른 입주자일 수도 있지만 돌아올 사람은 다 돌아온 상황에서 그런 차는 불문가지 뻔합니다. 나는 미소를 짓습니다. 볼거리가 생긴 거지요.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오토바이소리가 나면서 다방아가씨가 그 꽁무니에 매달려 나타납니다. 그리고는 그 정체불명의 차로 들어갑니다.
가관이에요. 시킨 커피는 안 먹고 사내는 아가씨에게 손수작하는 데에만 열을 올립니다. 차안이 어두워 자세히 보이지는 않아도 손이 부지런히 왔다갔다 실랑이하는 게 보입니다. 사내는 어떻게든 만지려고 하고 계집은 살살 약 올리며 손을 밀어내고. 강하게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약만 올리는 거지요. 그래야만 티켓이라는 걸 끊게 만드는 겁니다. 그렇다고 사내가 그냥 물러나지는 않아요. 완강하게 달려들 기세가 되고, 게다가 차안에는 그 사내 혼자뿐이 아닙니다. 대부분 두서넛이 있습니다. 아무리 닳고 닳아 약아 빠져도 사내들이 마음만 먹으면 아가씨는 어쩔 수가 없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 때 짠, 하고 나타나는 게 그 차돌이입니다. 오토바이맨인 그들은 보디가드 역할도 합니다. 아가씨를 태워다 주고 돌아가는 척 하지만 실은 어딘가에서 감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은 안되겠다 싶으면 크락숀을 울리며 나타납니다. 그러면 간단하게 상황 끝.
그 원룸에서 무수히 그런 짓거리들을 보았습니다. 가끔은 일이 잘 성사되어 아가씨를 태운 채 붕 내빼는 차들도 보곤 했지요.
그런 다방 아가씨들을 가지고 우리는 참 열심히 산다느니 어쩌느니 낄낄대면서 비하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 슬프고 비참한, 한마디로 개 뭣같은 삶입니다. 또 거기 맛들려 사는 나 같은 부류의 사내놈들은 더한 새끼들이고요. 그런 응달진 다방문화의 한 가운데에 나를 비롯한 그 뭣같은 놈들이 진대붙어 있으니 없어져야 할 어둔 문화라고 아무리 떠들쳐 봐야 소용없는 일이지 뭡니까.
다시 본 이야기로 돌아와서, 다들 알겠지만 다방레지들은 이름이 없습니다. 아, 이름이야 있겠지만 그건 주민등록증에나 있는 거고, 실지 그네들은 그저 박 양이니 김 양이니 불리는 게 상식이고 아니면 야! 어이! 그게 이름이지요.
그런데 그 레지는 별쭝맞게 아름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더군요. 본인은 진짜 이름이라고 우겨대긴 하지만서도 그거야 개 풀 뜯어 먹는 소리고, 그래도 제 딴엔 꽤나 세련된 이름이라고 여기는 것도 같은데 글쎄요.
어쨌든 이름은 그렇다 치고 이 여자가 아주 진품입니다. 단순히 얼굴만 따진다면 그리 빼어난 미모는 아닙니다만 몸에서 끼치는 분위기는 왠지 하늘거리는 코스모스가 생각나는 그런 여자입니다. 얼굴은 수수하면서도 묘한 신비로움이 곳곳에 수줍게 배어 있어요. 분위기에 따라서는 엑조틱한 매력도 풍기고요, 노란 루드베키아 꽃이 만발한 중앙아시아의 어느 철로변을 걷고 있는 우크라이나 처녀를 연상시키는 그런 이국적인 매력인데 나로서는 최고의 미사여구로 찬탄하려고 애는 쓰지만 후! 명색이 시인이란 놈이 도대체가 그녀를 묘사하는데 이렇게도 답답합니다. 한마디로 뻑 간 거지요.
그래요. 그녀한테 나는 빠져 버리고 말았어요. 그동안 수많은 레지들을 만나 보았고, 더구나 그녀보다도 훨씬 예쁜 아가씨들도 상대해 보았지만 아름이는 거기에 댈 게 아니었어요.
서해 바닷가에서 그녀를 파트너로 하루 즐기고 와서 결심했습니다. 내 여자로 만들고 싶었어요. 비록 우리가 평소 하찮게 취급하며 데리고 놀던 레지 신분이지만 눈에 백태가 끼면 어쩔 수 없는 거지요. 다음날부터 나는 그 다방에 가서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며칠 못 가 아픈 실연을 하고 말았어요. 그녀가 그 다방을 떠나 버렸어요. 정말 아팠습니다. 내 사랑이 그걸로 끝나 버리고 말았어요. 아니 끝나 버린 줄 알았는데…… 허 참! 그녈 다시 만나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나는 대전을 떠나 이곳 D읍으로 왔습니다. 용돈이 좀 궁해져 일자리를 듣보다가 이곳에 무슨 아파트공사가 있는 걸 알았습니다. 개버릇 남 못준다고 오자마자 다방 섭렵부터 시작했는데 글쎄 아름이를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된 겁니다. 세상에! 나는 이런 게 바로 연분이라 하는 게라고 제멋대로 여겼습니다. 정말이지 하늘의 도움이 아니고는 이렇게 다시 만날 수가 없겠기 때문이지요.
일이 끝나면 나는 곧바로 그녀 다방으로 퇴근했습니다. 아름이는 내게 참 잘해 주었어요. D읍에 온 첫날 그녀와 대면했을 때 그녀가 얼마나 반가워했는지 모릅니다. 낯선 곳에서 친분 있는 사람을 만났으니 당연히 그렇지요. 고로 그녀와 내가 가까워지는 건 아주 자연스러웠지요. 다른 아가씨들이 아예 나를 기둥서방처럼 보아 주었지요. 다방 여사장은 물론 좋지 않은 얼굴색을 드러내곤 했지만 나는 부지런히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참 사람의 감정이란 묘합디다. 자꾸 질투가 나는 겁니다. 그전에야 내가 좋아하던 아가씨가 어디 가서 무슨 짓을 하던 심상했습니다. 그거야 그녀들 직업이니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었으니까요. 한데 아름이한테 한번 마음을 뺏기고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온 신경이 가더란 말입니다. 그녀가 배달을 나가려고 쟁반보를 싸는 걸 보아도 싫고, 오토바이 뒤에 매달려 읍내거리를 달릴 때면 그 차돌이 녀석에게 불끈 질투가 솟는 겁니다. 또한 군턱이 미렷하고 개기름이 번지르르한 복덕방 노인네가 배달 온 그녀에게 농염한 음담을 지껄이고 있을 게 마음에 걸리고 더 나아가 쭈글쭈글한 손으로 그녀 허벅지를 만지겠다고 추근대는 정경이 눈에 보이는듯하여 나는 미칠 지경이었어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나 혼자만 속을 끓일 밖에. 작업만 요란했지 정작 내 마음은 그녀한테 비치지도 못한 걸요. 사실 말이지 다방레지한테 추근대는 거야 사내들이라면 다들 하고 있는 거니까 아름이 입장에서는 나 따위는 그런 뭇 사내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지로 내 마음을 넌지시 내보이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아름아 너 나랑 살래?"
"내가 너를 심히 좋아하는데 어때, 우리 애인할까?"
아니면,
"우리 이따 여관 가자"
따위의 내가 봐도 시시껄렁한 말로 중정 떠보아도 그녀의 반응은 별 다른 태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늘상 겪는 일이니까.
그런데다가 강력한 연적이 나타났습니다. 그가 바로 근철이라는 그 사내였습니다. 나이는 내가 한 살 위였지만 너나들이하면서 가까운 친구로 지냈습니다. 그는 별로 말이 없는 친구였어요. 그저 묵묵히 일만 할 뿐 쓸데없이 입만 나불거리는 나하고는 정반대의 인물이었습니다. 충청도 어디서 왔다고만 알뿐 그의 신상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진득하니 점잖은 그가 나는 마땅했습니다.
너울가지가 있어 나는 누구와도 잘 어울려 지냈지만 근철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제일 많았어요. 물론 아름이한테 작업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말이지요.
그런데 그가 내 연적이 된 것입니다. 둘이 대작하면서 그가 고백했습니다. 아름이가 마음에 든다고.
원체 말이 없는 성격에 그런 걸 털어놓을 정도면 그로서는 정말 심각한 게 아니겠습니까. 나는 흠칫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말했습니다.
"너 여자생각 나는구나. 우리 오늘 가자"
D읍에는 여자촌이 없어 군산까지 가야 합니다.
내 입발린 너스레에 그는 묵묵부답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사내란, 더구나 이방을 떠도는 사내들은 늘 여자를 그리워합니다. 여자를 품에 안고 있으면서도 여자를 그리워합니다. 사랑이 그리운 겁니다. 따듯하고 아늑한 사랑. 근철이가 아름이를 생각하는 것도 아마 그런 것일 겝니다. 하지만 나는 그저 흔한 육정 이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부터도 아름이를 사랑한다고 입만 열면 그 타령이었지만 솔직히 뼛속에서 우러난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나 역시 살정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는 감정이올시다. 사실 말이지 일개 다방계집에게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사랑 운운한다는 게 내 수준에 말이 되나요. 그래도 엄연히 등단 시인인데.
이쯤 해서 그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아름이에 대한 작업이 더이상 진전이 안 되고 지지부진해 나는 또 그 수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대저 여자란 건 복잡한 것 같으면서도 단순하기 그지없어 수만 가지 감정을 주무르고 제어하기를 잘 하다가도 어느 한 순간에 무너지는가 하면 아주 조그만 것 하나 때문에 천국으로 오르는 듯 순진하게 변모해 버립니다.
내가 만난 여자들 중 문학소녀 아닌 여자 없고, 요조숙녀 아닌 여자 없습니다. 현실에서야 비록 세태 속에 휩쓸려 갖가지 수단으로 살고는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언제나 그런 순수함을 동경하고 있거든요. 그걸 조심스레 끄집어내어 조금만 자극을 주어도 여자는 이성이 약해지기 마련이고 그걸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사내가 흔히 말하는 바람둥이란 족속입니다.
어찌어찌 나는 한 출판사를 알게 됐습니다. 거기서 만드는 잡지에 시와 소설 따위 문학작품들을 공모한다는 걸 알았어요. 그냥 알게 된 게 아니라 그쪽에서 먼저 입질을 하더군요. 사실 내가 시를 쓰네 어쩌네 하고는 있지만 그쪽 방면으로 나가기엔 애시 실력이 안 됩니다. 그래도 남보기 좋아 끄적대기는 했지요.
출판사에서 시 몇 편을 보내라고 넌지시 던지더군요. 그러더니 내 작품이 이번 공모에서 당선됐다는 연락을 해 왔습니다. 그 기분 누가 알겠습니까. 꿈에도 그리던 문단에의 입문, 작가로의 등단.
상금이 십만 원이라고 하더군요. 헐값이지요. 문학공모 당선상금이 십만 원이라니요.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랍니까. 문학계에 버젓이 등단하는 엄청난 일에 상금을 논하는 건 소인배들이나 하는 짓이지 않겠습니까. 그랬는데.
세상에 별 사기꾼이 다 있다더니 실은 나 말고도 당선자가 열 몇 명이 되더군요. 당선을 조건으로 자기네 책을 오십 권 이상씩 안겨 버리는 짓거리였어요. 십만 원 상금으로 백만 원을 도로 거둬들이는 신종 사기꾼이었습니다. 법적으로야 정식으로 등록된 하자 없는 출판사이니 범죄집단은 아니라 해도 그렇게 교묘하게 사기를 쳐 먹다니요. 어린아이들 사생대회에 상을 수십 가지를 만들어 놓고 참가자 전원을 입선시키고는 상패제작비라는 명목으로 돈을 우려내는 작자들 이야기도 몇 번 들었지만 이젠 다 큰 성인들을, 순수한 문학의 꿈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로 농간을 부립디다그려. 더구나 저작권은 평생 귀속한다고 하더군요 돈 십만 원에.
기쁨이 큰 만큼 상처도 받았지만 풀쳐 생각해 보니 그까짓 돈이 무슨 대수냐, 그래도 근사하게 시인이란 명찰을 걸고 뻐기고 다니면 오죽 좋을까, 더구나 내 실력에 언제 시 한 편 책에 인쇄해 볼까 하더군요.
그러루해서 내가 말끝마다 시인 시인 하는 비루한 놈이 된 겁니다. 물론 상금도 받은 그럴듯한 시인임에는 분명하지요? 속사정이야 어떻든 말입니다.
헌데 이 시인이라는 명찰이 쏠쏠하게 먹히더란 말입니다. 여자 몇 호리는데 아주 좋은 묘약이더군요. 당장 눈앞에 내 시가 실린 그 책을 내밀면 뻑 가게 마련이지요.
그래서 그 수를 아름이한테도 써 먹기로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치졸한 놈입니다. 한낱 다방레지한테 그런 유치한 짓거리가 다 뭡니까. 그래도 아름이는 대학 문턱은 넘어 봤다고 하는 인텔리라고 하니 - 물론 자기 입으로 하는 말이므로 믿거나 말거나 - 좀 씨가 먹히지 않을까 에멜무지로 찔러 봤던 건데 역시 묘약입디다.
"어머 시를 써?"
내가 다방 구석 테이블에 눌어붙어 앉아 쪽지에 끼적이던 걸 건네주니 아름이가 생뚱한 빛이 역력한 눈을 하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과연 약효가 있었던 겁니다.
매일 한 편씩 시를 써 주었습니다. 유행가 가사에서 그리 많이 벗어나지 못하는 수준의 말 그대로 허접한 글이지요. 시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걸 읽는 그녀는 진짜 좋아하는 눈치였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랬다는 거지요.
"우리 오빠도 시인이야"
어느날, 내가 그날은 다른 사람의 시를 베껴 가서 읽어 주었는데 그걸 듣고 난 그녀가 그랬습니다.
"그래?"
하고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습니다.
"김현수라고 알아? 제법 유명하다던데. 벌써 시집 일곱 권 냈거든"
나는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모른다고 하면 안 되겠어서 안다고 말해 놓고는 다른 걸 더 물어 볼까 보아 내심 불안했어요. 그러나,
"난 시 같은 건 몰라. 한번도 우리 오빠 책을 들여다 본 적도 없구. 그래두 학교 다닐 땐 김소월 시집을 끼고 다녔는데…… 인제 시간만 나면 잠자는 게 제일이야. 우린 잠이 모자르거든"
하는 말로 끝막음되었습니다.
어쨌든 시인이라는 명함을 내세워 슬슬 그녀에게로 접근해 갔습니다. 당시 내 속셈을 나 자신도 잘 몰랐습니다. 다방여자를 내 것으로 만들어 뭘 어떻게 하려고 했는지 요량도 없었어요. 분명한 건 그 여자를 사랑하지만 결혼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애시 없었습니다. 말했지만 사랑이라는 말 속에는 육정이라는 뜻이 들어 있었으니까요. 일개 다방계집에게 결혼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그러면 그 여자를 돈을 주고 사면 되지 굳이 그렇게 애써 근사를 모을 필요가 있느냐는 건데, 글쎄 그게 참 묘한 심리지요. 물론 돈만 주면 얼마든지 그녀를 취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러면 그녀가 그냥 싸구려 여자로 전락되고 말지요. 내게 아름이는 특별한 여자거든요. 그렇게 비천한 여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적어도 내게는. 아니 또 한 사람 근철이가 있었군요. 그냥 그 여자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정 뭣하면 동거까지는 할 수 있다는 선까지 그어 놓고요.
우리는 제법 유치한 데이트를 즐겼습니다. 그녀가 쉬는 날 바닷가에 나가 '나 잡아 봐라'도 해 보았고, 해송에 기대 달착지근한 키스도 해 보았습니다. 그럴 때의 아름이는 천한 다방레지가 아니었습니다. 가슴 저린 사랑이었다구요. 그녀는 한 달에 두 번만 쉬었습니다. 바닷가에서 세 번 데이트를 하다 보니 훌쩍 여름이 되었고, 내내 따분하기 그지없는 이 D읍도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어요. 사방에서 장사꾼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고, 성급한 피서객들도 하나 둘 해변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공사판에서 일을 했고, 저녁이면 다방으로 갔습니다. 그녀가 없을 때가 더 많았어요. 워낙 배달이 많으니 한가하게 나랑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지요. 말 그대로 참 열심히 사는 그런 여자였습니다.
지금 생각에 그렇게 땀을 흘리며 열심인 그녀에게 어느 하루 마음껏 놀게 해 주고 싶었는데 그걸 못해 준 게 못내 아쉽고 서운합니다. 휴가철이 되면 다방도 성수기라 그나마 두 번 쉬는 날도 없어지더군요. 그래 수영복을 입고 피서객들 속에 끼어 즐기려던 바람은 끝내 접고 말았지요.
그리고 구월이 코앞에 다가왔어요. 피서객도 썰물처럼 빠지고 장사꾼들도 하나 둘 사라져 가던 그 어름에 나는 해머로 얻어맞은듯한 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아름이가 보이지 않았어요. 대전에서의 그때처럼 가뭇없이 그녀가 D읍에서 사라진 겁니다. 그렇게 허무하고 황당할 수가 없었어요. 다방레지들이야 뜨내기 신분이라 하시(何時)라도 바람처럼 사라지는 거야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아름이가 아닙니까. 바로 내 여자라니까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머릿속이 텅 빈 공황상태였어요. 머릿속을 추설 시간도 없이 재차 또다른 충격을 먹고 말았습니다. 아름이의 동료였던 장 양으로부터 그간 내가 모르게 진행돼 왔던 전모를 듣게 되었습니다. 아, 타불아멘알라. 그 중심엔 바로 근철이가 있었습니다. 내가 어찌 그렇게도 모르고 있었을까요. 원체 말이 없는 사내였음이라. 그제 생각하면 듬직하고 점잖은 게 아니라 능갈맞고 음흉한 작자가 아니던가요. 사실 내가 근철이를 좋아한 것도 듬쑥한 됨됨이가 오히려 어수룩해 보이는 맛이 있어서였는데 교만하기 짝이 없는 내가 주제를 모르고 함부로 그를 나지리 본 게 실수였습니다. 장 양의 이야기는 대충 이런 거였습니다. 근철이가 아름이에게 접근하기 시작한 건 근 일 년이 다 돼 간다는 것 하고, 그가 남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걸 아름이도 알고 있었다는 것, 그럼에도 아예 모른 척하고 그쪽에서 마음을 줄 기회를 처음부터 차단했다는 것, 왜냐하면 아름이 자신 또한 그 남자에게 끌리고 있었고 그럼에도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니 더더욱 그를 밀어내야 했다는 것, 그렇지만 그 남자에 대한 고민도 하고 연민도 많았다는 것, 그럴 즈음 내가 나타났고 일종의 보상심리로 아름이의 그에 대한 연민과 애틋함이 부러 눈에 보이게 내게로 향했다는 것, 이런 이야기들을 장 양은 너무도 무심하고 심상하게 주절댔습니다. 나는 핏줄이 터질 지경인데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아름이가 근철이에 대한 말을 한 적이 있긴 있었습니다. 딱 한 번요. 내가 그것도 시라고 시식잖게 끄적거려 한참 그녀를 구워삶느라고 욕보던 그 때쯤이었어요. "그 아저씨 꼭 우리 오빠 닮았어" 그게 전부였습니다. 뭐가 닮았는지, 또 닮았다고 해서 뭐가 어떤지 나와는 동떨어진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제서 생각나는 건 무슨 연유인가요. 또한 근철이도 아름이 말은 한 번 밖에 낸 적이 없습니다. 그녀가 마음에 든다고. 그것도 뒤늦게 솔솔 떠오르는 것도 기가 막힙디다.
자, 이제부터가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이걸 쓰려고 여태 군것진 이야기들만 너저분하게 늘어놓았습니다. 순전히 장 양의 입을 통해 들은 이야기예요.
근철이가 다방에 오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저 한 달에 서너 번 정도 될까 한데 저녁나절에 오는 게 대부분이었어요. 와서는 아름이가 있으면 둘이 앉아 도란거리기는 했지만, 아름이가 없을 때가 더 많으므로 대개 여느 놈팽이들과 다름없이 레지와 희영수나 하다가 가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다방의 식구들은 누구나 그가 아름이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걸 알게 됐어요.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아도 그 여자들이야 척 하면 척 아니겠습니까. 눈치 하나로 사는 족속들인데요.
그런데 그 여자들은 근철이의 그 마음을 허투루는 안 봤습니다. 매사 그렇다는군요. 아무리 못나 보이는 사람도 그가 간직한 순정까지도 못난 게 아니니 함부로 네뚜리로 보지는 않는대요. 진정으로 순수하고 진지하게 생각한다네요. 그러면서 오히려 다방여자에게까지 사랑을 호소하는 그 사람을 진정으로 동정한다고 합니다.
장 양이 보기에도 근철이의 사랑은 그저 일방으로 가다가 끝날 것이 뻔해 보였습니다. 말없이 수더분하고 어리눅은 그 남자가 끝내는 실연으로 아프게 돌아서 갈 게 좀 안돼 보였습니다.
그걸 보면 장 양이란 그 아가씨도 깨나 맘씨 고운 여자인 것 같습니다. 내가 '커피 한잔!' 하며 주문하고 배달시키며 함부로 대하던 여자들 중에는 그런 유의 아가씨들도 없지는 않은 겁니다.
아름이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는 근철이가 안 됐어서 그가 오면 장 양이 부러 곰살궂게 대해 주곤 했는데 근철이는 웃으면서 그렇게 안 해줘도 된다고 오히려 상대방을 어르더라나요. 또 그게 더 마음이 쓰려 웬만하면 자기가 대신 그의 애인이 돼 주고픈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속정은 아니었겠지만 말입니다.
삼복 입추가 지나고 여름이 끝나 D읍이 다시 조용하고 따분하게 가라앉아 가는 그 즈음에 바로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아침 손님도 없고 배달도 없어 아가씨들은 제멋대로 퍼질러 앉아 시시덕거리고 있었어요. 비를 들고 다방 현관을 쓸고 있던 아가씨가 뛰어 들어왔습니다.
"아름아! 아유 언니 좀 나와 봐!"
다들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곧 이어 모두들 멍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근철이 그 친구가 들어섰는데, 그의 얼굴은 보이지도 않았어요. 웬 도라지꽃을 산더미처럼 안고 들어오는데 앞이 안보이니까 방향을 못 잡고 갈팡질팡 테이블과 소파를 여기저기 부딪치다가 풀썩 넘어지고 말았어요. 도라지꽃이 바닥에 확 풀어 헤쳐지고요.
그 때까지도 다방사람들은 그냥 보고만 있었지요. 그가 들어서는 순간 모두에게 퍼뜩 똑같은 생각이 떠오른 겁니다. 이런, 세상에!
언젠가 근철이가 놀러왔을 때 아가씨 너댓이 그와 어울려 노닥거리는 중에 아름이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가 꽃을 참 좋아한다느니 색 중에 보라색을 좋아한다는 말이 흘러 나왔었습니다. 근철이가 도라지꽃을 안고 들어서는 순간 모두는 그 생각을 떠올린 겁니다.
넘어졌던 근철이는 툭툭 털고 일어서면서 부지런히 눈동자를 굴리는 게 아름이를 찾는 모양이었습니다. 물론 아름이도 그 중에 있었는데 그녀 또한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어요.
아름이와 시선을 마주친 순간의 그의 얼굴은 두고두고 얘깃거리였습니다. 그 무뚝뚝하고 멋대가리 없던 얼굴이 어쩜 그리 해사하고 산드러지던지 방금 아침놀을 담뿍 받고 들어온 것처럼 이쁘고 황홀했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아름다운 얼굴은 다시없을 정도였습니다.
한참동안 두 사람은 눈빛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잠시 모든 것이 정지해 있는 듯 했어요. 근철이가 눈을 풀고 그제야 정적도 풀렸습니다. 아름이의 얼굴이 점점 발갛게 물들었습니다.
근철이가 다시 밖으로 나갔습니다. 잠시 뒤에 또 그만큼 도라지꽃을 안고 들어오는 게 아닙니까. 그걸 아름이 앞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또다시 나갔습니다. 또 도라지꽃이 들어오고.
아가씨들이 밖으로 따라 나갔습니다. 엄마야! 그네들은 탄성을 올리지 않을 수 없었어요. 다방 앞에 화물트럭 하나가 서 있었어요. 적재함에 도라지꽃이 잠뿍 실려 있었습니다. 어디서 그렇게 많은 도라지꽃을 구했는지 그것도 알쭌히 보라색 만으로요. 아가씨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보고만 있고 근철이는 열심히 도라지꽃을 날라 들였습니다. 다방은 말 그대로 도라지꽃 산이었습니다.
그랬다는군요. 생각해 보세요. 어느 여자가 그런 남자의 연정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세상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주고받고 있을 테지만 그처럼 무식하게 고백하는 건 유사 이래 오직 근철이 그놈 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어느 누가 무식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감히 누가 그 순수한 사랑을 보고 웃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탄식했습니다. 내 자신이 얼마나 구역질나게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장 양의 이야기를 다 듣지 않고 그냥 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어제 해수욕장에서 그렇게 조우하게 된 겁니다. 근철이가 어느 때 그러더군요. 한 며칠 쉬겠다고요. 고향에 좀 다녀온다 그랬습니다. 얼추 그때와 시간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오랜만에 만났는데 좀 떨떠름한 만남이긴 해도 나를 피해 버린 건 섭섭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찬이슬이 축축이 마당을 적시고 써늘한 바람이 탱자나무 울타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오래 뒤척였습니다.
오늘 아침 늦도록 비비적거렸습니다. 보통 날에도 열 시 열한 시는 기본이지만 오늘은 머리도 무겁고 몸도 찌뿌드드하니 꼼짝하기가 싫었어요. 내처 하루 뭉그대려고 생각했는데 손님이 들이닥쳤습니다. 우악스럽게 쳐들어온 게 아니니 들이닥쳤다고 하는 게 이상한 표현 같긴 하지만 정말입니다. 그게 근철이와 아름이었으니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새벽에 잠들기 직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에 대한 서운함이 무지근했었는데 뜻밖의 방문을 받고 보니 어느 결에 스르르 누그러지고 말더군요.
참 유쾌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 셋이 한자리에 있어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습니다. 또한 마지막이기도 하구요. 나야 조만간 D읍을 떠날 요량이고, 근철이도 고향집으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색시와 더불어.
아름이는 목발을 짚고 있었습니다. 사족같은 얘기를 더 하자면,
그때 며칠 쉬겠다고 하고 나서 그는 아는 사람한테 트럭을 빌어 고향으로 갔다고 합니다. D읍에서 한 육십 킬로 들어가는 곳인데 그의 머릿속엔 온통 도라지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뭘 못하랴. 보라색 꽃. 여름 내내 그는 고향집 부근의 그 도라지밭을 생각하며 얼른 꽃이 피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보라색과 흰꽃이 한데 어울려 핀 도라지는 그의 가슴처럼 바람에 물결치고 있었어요. 밤이 되기를 기다려 낫을 들고 모조리 베기 시작했습니다. 보라색 꽃만을 원했으나 어스름 반달 아래 그걸 골라 가며 베기엔 시간이 없었습니다. 날이 밝기 전에 어서 떠나야 했습니다. 남의 작물을 훔친다는 죄책감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만 들키면 낭패기에 부지런히 베어 적재함에다 착착 쌓아 올렸습니다. 잠뿍 쌓아 올린 다음 대충 뚝바를 매고는 정신없이 그곳을 빠져 나왔습니다. 적당한 지점에 와서야 한숨을 돌리고는 다시 뚝바를 풀었습니다. 그리고는 보라색과 흰색이 뒤섞인 꽃을 일일이 골라내기 시작했습니다. 땀은 온몸으로 흘러내리고 모기들은 이악스럽게 달려들었어요. 그래도 그는 오로지 보라색 꽃 고르는 데만 열중했습니다. 작업이 다 끝나자 허옇게 동살이 잡히고 있었습니다. 그 길로 D읍의 아름이에게로 달려간 겁니다.
"그동안 도라지 밭에 가 있었다."
근철이가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죗값은 치러야 할 것 같아 도라지 임자를 찾아가 낱낱이 고하고 대신 몇 달이고 이집 일을 도맡아 해 드리겠다고 무릎 꿇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물론 아름이와 함께였습니다. 그간 둘이는 거기서 일을 했습니다.
다리는 근철이가 로터리를 치다가 기계를 끌어안고 굴렀는데 그는 멀쩡하고 곁에 있던 아름이가 다쳤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어제 아름이가 업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녀가 다치자 주인은 이제 그만 해도 된다고, 어서 가서 치료 받고 살림 차리라며 치료비 뿐 아니라 얄팍하지만 품삯 든 봉투까지 건네주며 두 사람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이제 집으로 가서 부모님하고 살 거다"
그가 말하며 아름이를 돌아볼 때 그 눈엔 애정이 하나 가득이었습니다. 어떻게 거기에 질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는커녕 내 가슴이 다 환하게 밝아지더군요.
"어제 바다에서 널 봤지. 반가웠는데 아름이가 돌아가자 그러더라구. 여자들 속 좁은 거 알잖아. 아무래도 얘가 너 보기 민망해 하는 거 같아 그냥 피했다. 미안하다, 니가 좀 봐주라."
아름이가 배시시 웃었습니다. 화장 안한 미목이 어찌 그리 깨끗하고 고운지요. 누가 그 여자를 다방년이라고 하찮게 여기겠는지요.
둘은 저녁 때까지 놀다 갔습니다. 아름이는 올 때처럼 갈 때도 근철이 등에 업혀 갔습니다. 나도 진정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했습니다.
"오빠, 시 열심히 써"
그녀가 가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실쭉 삐쳤어요. 어쩐지 나를 조롱하는 것 같이 찔려서 말입니다. 자격지심이겠지요. 그렇지 않아도 이번엔 소설로 등단해 볼까 했는데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아름이를 보내며 잠깐 망설여 보기도 했습니다.
아무려나 나는 이제 D읍을 떠날 거고 또 어디 가서 시인 명함을 내놓고 어떤 골 빈 여자를 후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다만 이제는 다방엔 가지 않을 것만은 확신합니다.
가을 저녁의 찬 기운에 어깨를 응등그리며 오랫동안 탱자나무 두른 마당을 배회했습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