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설리숲 2013. 12. 31. 00:40

 

 먹는 게 변변치 않으니 밥이라도 많이 먹었다. 없이 살아도 밥에 대한 인심은 넉넉해서 뉘 집엘 가도 고봉밥을 받았다. 지금은 공기가 밥그릇이지만 예전엔 주발이었다. 밥은 주발 국은 대접에 담아 꼭 격을 갖추었다.

 그 주발에다 태산을 쌓듯 높다랗게 고봉을 담아 주는 게 상식이었다. 손님에게만 하는 대접이 아니라 일상의 식문화였다. 그런데도 그 많은 밥을 다 먹었다. 농사라는 게 힘이 부치는 일이라 촌사람들은 그저 배가 나오도록 든든하게 먹는 게 미덕이었다.

어느 집에 손님으로 가면 밥을 남기는 게 또한 미덕이었다. 성에 차지 않아 조금 더 먹고 싶어도 한 숟가락이라도 남겼다. 어린 아이에게도 어른처럼 고봉밥을 떠 주니 아이는 또 양이 많아서 남겼다.

식사가 끝나면 주인은 여러 사람이 남긴 밥을 다 몰아 거둬 양재기에 한데 넣는다. 그건 또 뒀다가 먹을 밥이다.

 

 유년시절이 끝날 무렵 시내로 나가 국민학교에 취학하였다. 몇 해가 지난 뒤 예 살던 고향에 놀러 갔었는데 역시나 밥이 고봉밥이었다. 그새 도시 물을 먹었다고 나는 그 고봉밥이 난감했다. 도저히 다 먹을 수 없는 엄청난 양이었다. 시내서는 공기에다 밥 먹는다지? 그렇게 먹고 우티게 사는고. 밥을 많이 먹어야지. 안주인은 내게 그렇게 후한 인심을 표했는데 나는 고봉밥에 차마 숟가락을 댈 엄두를 못 내고 미적거렸다. 다 못 먹고 남길 것이 뻔해서였다. 말도 못 하고 어쨌든 먹긴 먹었는데 예상대로 금방 배가 불렀다. 남기는 것이 미안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두어 숟가락은 다 남겼다. 전통의 미덕이었다. 그리고 역시 남은 밥은 한군데 다 모았다.  도시 물을 먹은 내 눈에 그게 참 더럽게 느껴졌다. 먹던 밥을, 그것도 깨끗하게나 먹은 것도 아니고 국물에다 반찬도 묻은 밥들을 모아 뒀다가 그걸 먹는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께름했다. 그때 처음으로 촌사람들을 경멸하였다. 시내서 세련되게 산다는 근거 없는 우월감이었다.

 

 소견머리 없는 경멸감이었지만 실제로 비위생적인 건 맞다. 그러나 위생 비위생의 잣대로 볼 수만은 없다. 밥은 식량이고 생명이었다. 굶주림이 가장 무서운 존재였다. 밥 한 톨도 헛되이 버릴 수가 없다. 그것마저도 없어 삼시 세끼를 죽으로 때우거나 그것마저도 못 먹는 날이 올 것을 그들은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못 먹어 누렇게 부황 난 몰골로 죽어가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비위생적인 말은 부질없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공깃밥이 일종의 사회적 계층의 의미도 있었다. 고봉밥은 무식한 촌사람들의 식문화라는 개념이었다.

 언제부턴지 우리는 밥 양이 현저히 줄었다. 지금 돌아보면 주발 고봉밥은 현재의 공깃밥에 비해 너덧 배나 되는 양이다. 그렇게 먹어서는 짜장 몸 건강에 좋지는 않다. 또한 그렇게 먹는 사람도 없다. 경제수준이 높아져서 그런 걸까. 잘 모르지만 모쪼록 긍정적으로 사려하려고 한다.

 

 아무려나 내 그릇의 밥을 다 비우지 않고 남겨주는 그 배려는 가난한 사람들의 훈훈한 미덕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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