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고 척박한 산골마을의 살이지만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으니 그래서 용케도 떠나지 못 하고 게서 묻히는 것이다.
먹는 게 주려도 산과 내와 들에는 자연이 주는 먹을거리가 풍성했다. 두릅 고사리 버섯 따위 산채, 다래 머루 돌배 팥배 등 산으로 들어가면 먹을 것 지천이었다. 삘기 찔레 애광 시광 싱아, 하다못해 이른 봄 여기저기 덜퍽지게 피어난 진달래도 먹었고 냉이와 달래를 캐느라 아지랑이 머슬거리는 봄 묵정밭에는 큰애기들이 돌아다녔다. 가을에는 도토리를 주어다 묵을 쑤어 먹었다.
가난한 살이에 고기가 젤 주렸다. 무슨 잔치나 초상이 있을 때라야 육고기를 갈근거렸고 이따금 집에서 키우는 닭이나 개를 잡아먹었는데 그것도 어쩌다 있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것 또한 산내들에서 적으나마 아쉽지 않게 해결하였다. 곳곳에다 창애나 올무를 놓아두어 꿩이나 토끼 따위를 먹었고 여름 내내 농사일 틈틈이 개천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어른들이나 다 큰 형들은 한데 모여 천렵을 할 때가 많았다. 냇가에 딴솥을 걸어 놓고 꽤나 많은 물고기들을 끓여 막걸리와 함께 하는 날은 고단한 나날 중에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다. 어른들이라 물고기 잡는 방법도 조직적이고 대규모였다. 족대를 쓰기도 하고 보쌈을 놓기도 했다. 재주 좋은 사람은 손더듬질로 기가 막히게 잡기도 했으나 이건 워낙 까다로운 기술이라 보통은 하지 않았다. 또는 물고기가 많이 들어 있음직한 커다란 돌덩이를 망치나 돌덩이로 내리쳐 돌 밑의 고기를 기절시키는 방법도 있다. 먼 동네에서 낯선 사람들이 와서는 배터리를 장착한 도구로 감전시켜 잡기도 했지만 그건 너무 위험해서 우리 마을에서는 하지 않았다.
꼬마들은 천렵을 할 만한 깜냥이 안 돼 그저 족대로 분탕질치고는 집에 갖고 가 엄마더러 끓여 달라 하였다.
어느 때 혼자 개울가로 놀러 나갔는데 꼬마들이 족대로 고기를 잡고 있었다. 꼬마들이라지만 다 나보다는 서너 살 정도는 많은 형아들이었다. 아는 아이들도 있고 낯선 아이들도 있었다. 심심하기도 해서 구경도 할 겸 붙었더니 즈들이 들고 있던 주전자를 나더러 들고 다니라며 건네주었다. 주전자에는 버들치와 피라미가 많지도 않고 셀 수 있을 정도로 들어 있었다. 어린 땅꼬마인 나를 끼워준 게 좋아서 신나게 따라다니다가 그만 엎어져 들고 있던 주전자를 쏟았다. 몇 마리 되지 않는 고기를 놓쳤다. 그때의 캄캄했던 심정이 여태까지 생생하다.
기분으로는 나를 때려주고 싶을 만큼 속상했을 텐데 아무도 내게 뭐라 하는 아이가 없었다. 하기사 어린 땅꼬마인 내게 주전자를 들린 게 즈들의 잘못이긴 했다. 그렇지만 나는 죽을 죄를 지은 심정이 돼서 조마조마 굽죄이고만 있었다. 그대로 집으로 돌아오기는 더 죄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저 죄인처럼 있었다. 여하튼 순박하고 착한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기분이 잡쳤는지 이내 족대를 거둬 고기잡이가 파했다. 어차피 많이 잡지도 못했고 또 아이들이라 잡은 고기를 처리할 수도 없었다. 즈들이 솥을 걸어 놓고 끓여 먹을 것도 아니니 그냥 들고 다니다가 어디엔가 그냥 버릴 것이었다. 내가 엎질러 버려 고기들을 물에 살려 주었으니 결과적으로는 차라리 그게 잘 된 일이었다.
여름도 절정이 지나 벼이삭이 패기 시작하면 들판은 온통 메뚜기가 지천이었다. 메뚜기잡이는 아이들이 하였다. 소주병에 잡아넣거나 가라지 꽤기에다 졸망졸망 꿰어 가면 그날 저녁에는 메뚜기볶음을 먹었다.
졸졸거리는 산골 물에는 가재가 있었다. 돌을 들추면 반드시 한두 마리는 있어서 아이들은 놀이로 가재잡기를 즐겼다. 잡아서는 등딱지를 벗기고 그 자리에서 구워먹었다. 시커멓던 놈이 불에 익으면 새빨갛게 바뀌는 게 참 신기하였다.
그중에서 가장 신나는 일이 개구리잡이였다. 개구리도 여러 종류여서 먹는 개구리가 따로 있었다. 지금은 정식 이름이 산개구리, 또 한국산개구리라 되어 있는 그 종류였는데 내 살던 고향에는 그 개구리가 참 많았다. 이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좋아하는 일이었다, 역시 어른들은 재주가 좋아 한번 작업에 임하면 대규모로 잡곤 했다. 잡아서 그 자리에서 구워먹는 게 다반사였으나 어른들 합동작업은 어느 집을 정해 그 집의 가마솥에다 끓였다. 그 안주인은 예정에도 없이 그날 오후는 그 일에 매달려야 했다. 그 날 저녁엔 동네 사람들이 죄다 그 집에 몰려와 개구리를 먹었다. 내 기억에는 거개가 남자들이었고 여자들은 잘 안 다녔다. 난 여자들은 개구리를 안 먹는다고 생각했으나 우리 누이들도 개울에 나가 잡아서 구워먹는 걸로 보아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개구리는 물이 아난 밭에서도 잡았고 벼를 벨 때도 논바닥에서 뛰어다녔다. 벼를 벤 휑한 논에서도 아이들은 개구리를 쫓아다녔다.
겨울에는 개천이 꽁꽁 얼었다. 어른들은 곡괭이나 삽 등을 들고 얼음을 깨고 잡았다. 동면중이라 겨울 개구리잡기가 훨씬 쉬웠다. 그저 돌을 들추고 주워내기만 하면 되었다. 깬 얼음장에도 개구리가 파묻혀 들어 있기도 했다. 살을 에는 추위에도 그렇게 잡다 보면 어느새 몸이 훈훈해지고 잡은 개구리는 모닥불을 지펴 구워먹었다. 아 그 따스한 겨울날의 정경이여!
이토록 산내들에 먹을거리가 넘쳐났으나 그래도 산골 사람들의 먹성은 늘 주렸다. 늘 배고프고 육징이 났다. 참 애달픈 삶이었다.
조반 먹었나?
언제부턴가 이 인삿말이 없어졌다.
그 시절 아이들에게 이런 노래가 있었다. 오동동타령 노래를 개사해 불렀다.
깡통 주께 밥 읃어 와라
배고파 죽겠다
닷새 엿새 굶었더니
뱃가족과 등가죽이 사둔하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