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라는 것. 사람에겐 절박하지 않은 것이면서도 중요한 것임을 안다. 첫인상의 중요성. 어느 연예인의 한순간의 일탈이 가져오는 이미지 추락. 그는 이후로 평생 연예인으로서 다시 서지 못 하기도 한다.
우리는 대중가요로 추억을 소유한다. 잊고 있었던 그 겨울 그 골목길의 영상을 먼 세월의 간격을 넘어 스르르 바로 곁인 양 불러오는 능력을 노래는 지녔다.
대중가요도 이미지를 먹고 산다. 이용복의 <1943년 3월 4일생>이란 노래는 ‘어머님 왜 나를 낳으셨나요’ 하는 가사와 더불어 맹인인 그의 삶의 불행을 담고 있다. 어린 시절 선글라스 낀 눈으로 울면서 노래하던 그 광경은 평생 잊히지 않는다.
재수생시절 어느 봄날 TV에서 쇼를 보고 있었다. 한때 시대의 아이콘이라는 이효리 이상으로 당대 가장 최고의 위치에 있던 혜은이가 노래를 한다. 질투. 노래도 좋고 가수도 좋은데 그 노래는 귀에 익은 노래다. 영국 가수 Kim Wilde의 <Kids In America>라는 노래를 이미 알고 있었다. 혜은이는 분명 표절을 했다. 노래가 거의 똑같다. 아예 똑같다면 번안가요라고 치부해 버리겠지만 똑같지도 않고 비슷하게 나가다가 빠지고 다시 또 비슷하게 돌아오고. 그러니 영락없는 표절이었다. 당시는 표절에 대한 인식이 희박한 때라 별 문제는 없을지라도 나는 참 양심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으로 화면을 보고 있다가 그 난리가 터졌다. 쇼를 하던 화면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실제상황이라는 자막과 함께 북괴군이 쳐들어왔다는 긴급속보가 나왔다. 사이렌 소리도 들리고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시상황이었다. 이어 시시각각으로 보도는 북괴군이 아니라 중공 비행기라고 수정됐고 최종 중공민항기로 보도됐다.
1983년 5월 5일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춘천에서 있었던 일이다. 작은 도시 춘천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영광의(?) 몇 날이었다.
냉전시대의 절정이던 그때 북한과 더불어 가장 냉랭하고 멀었던 중공과의 어색한 첫 대면인 셈이다. 시작은 어색하고 뻘쭘했지만 불시착한 민항기의 처리를 두고 양국의 고위관계자들이 대화를 트는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다.
이것이 그 10여년 뒤의 한중수교의 밀알이 되었다. 오랜 세월의 적대감을 털고 양국은 대문을 활짝 열었고 비로소 중공이 아닌 중국이라는 본래의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우리가 중국이라 부르던 또다른 중국의 국호를 대만이라 바꾸었다. 자유중국은 우방이라 믿었던 한국의 배신에 분노했다. 그리고 그 보복으로 한국과의 수교를 끊어 버렸다.
여전히 대만은 한국에 대해 앙금이 많다. 원망과 증오와 질투가 섞인 불편한 감정이다. 일부 일본인들에게 반한·혐한 정서가 있지만 대만은 거의 모두가 기본적으로 한국에 대한 시기와 미움을 지니고 있다.
그 봄날 오후, 혜은이가 부르던 <질투>가 그 후의 역사적인 대변혁의 상황으로 이어졌다고 나는 굳이 갖다 붙인다. 며칠 전에 킴 와일드의 역사적인(?) 이 노래를 우연히 들으면서 30년 전의 질투를 떠올렸다. 이것이 이미지다. 앞으로도 길래 이 노래를 접하면 언제 어떤 상황일지라도 그날의 중공민항기와 대만과의 관계에 대한 불편한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Kim Wilde : Kids In America
당시 킴 와일드(Kim Wilde)를 노래로만 듣다가 화면으로 직접 보게 되었을 때 그 빼어난 미모에 반했었다. 게다가 내가 로망하는 금발의 여인이라니.
DJ 김광한은 킴 와일드를 소개하면서 노래하거나 방송에 나올 때 전혀 웃지 않는다고 했다. 일상생활은 같이 안 있어 봐서 모르겠다고 했다. 그녀의 웃지 않는 시니컬한 표정이 참 매력 있었다. 그녀로서는 이미지 컨셉트였겠지만.
그 후로도 간간히 음반을 내놓으며 여전히 가수로서 지내고 있다. 초창기의 컨셉트는 접어두고 웃는 모습이 많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늙어서 내가 빠졌던 그때의 미모는 전혀 없다. 시니컬한 이미지도 전혀 없다.
세월은 아름다움을 '질투'한다.
나중에 혜은이의 <질투>는 표절이 아니라 원곡을 번안한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면 첨부터 끝까지 똑같이 할 것이지 중간중간 원곡의 멜로디에서 이탈하는 건 무슨 경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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