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을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서성으로 진격한 사마의는 너무나도 고요하고 평온한 분위기에 당황하였다. 절박한 전세에 분명 촉의 군대는 결사항전의 전의로 성을 지키고 있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성문은 사방이 활짝 열려 있고 적병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데 성루에는 촉의 군사 제갈량이 홀로 앉아 비파를 타고 있었다. 그 귀기 서린 분위기에 사마의는 공격할 엄두를 못 내고 있다가 결국 말머리를 돌려 후퇴하고 말았다.
삼국지에는 여러 명장면이 나오지만 나는 또 이 장면이 인상 깊다. 중국 특유의 정서를 풍기는 부분이다. 비파라는 악기를 처음 접했다.
살벌하고 처참한 전쟁터에도 음악은 있었다. 그 유명한 사면초가(四面楚歌)나 십면매복(十面埋伏)은 음악을 심리전에 이용한 예이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는 미군이 적을 향해 바그너의 음악을 선사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 때 영국군과 독일군이 크리스마스 하루 휴전하고 캐럴을 부르며 잠시 동안의 평화를 누린 실화가 있다.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비파 타는 장면은 두어 번 더 나오는데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 했던 이 악기에 대해 무척이나 신비감을 가졌었다. 이따금 중국계의 민화 따위를 보면 보이는 그 악기가 비파라는 것도 그 후로 알게 되었다. 많이 대중화 되지는 않았지만 얼후와 더불어 중국음악에 가장 요긴한 악기이다. 중국 고유악기인가 했으나 찾아보니 그건 아니고 기원은 페르시아 등 아랍지역에서 처음 태생했다고 한다. 이것이 유럽으로 가서 류트가 되었고 동양으로 가서 비파가 되었다. 중국뿐 아니라 일본음악에서도 많이 연주되었다.
영화 <삼국지:용의 부활(2008)>중, 조조의 손녀 조영으로 분한 매기 큐의 비파 타는 장면
음악은 전쟁에서 심리전의 중요한 무기가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비파가 그리 많이 쓰이진 않은 것 같은데 ‘내외간 금슬이 좋다’는 표현으로 보아 옛날부터 널리 알려진 악기임을 짐작한다. 금슬(琴瑟)은 거문고와 비파다. 거문고와 비파소리의 어울림처럼 부부간의 관계가 좋다는 말이겠다.
공성계(空城計)의 전법을 쓴 제갈량의 일화에서 실은 비파는 그리 중요한 장치는 아니다. 다만 적군에게 주는 불안감을 좀더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적절했던 것 같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인간들에게 음악이니 악기니 하는 것들은 사치다. 배가 부르고 나야 음악을 들을 여유가 있는 것이다. 옛날 문학과 풍류를 즐긴 고관대작들의 생활을 보면 멋들어지고 낭만적이라고 할 수만은 없는 게 일반 백성들은 하루를 사는 게 고달픈 처지였는데도 정자를 짓고 기생을 불러 가무와 풍류를 누린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부르주아의 전형이다. 하긴 그렇기 때문에 음악이 발전하고 미술이 발전했으니 부정적으로 비판할 수도 없다.
단원 김홍도는 풍속화로만 알고 있지만 생의를 위해 춘화도 그렸다. 그 돈으로 생활을 영위하면서 위대한 예술품
을 남겨준 것이다. 돈과 음악은 여유다. 서성에서 제갈량의 비파는 여유를 의미한다. 그 천연덕스러운 여유에 적군은 스스로 퇴각한 것이다.
이 작품은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다. 김홍도는 그림 속에 자신을 그려 넣었다. 그가 연주하고 있는 악기가 비파다. 포의는 청빈을 상징하고 비파는 여유와 풍류다. 벼슬 없이 안빈낙도하는 자신의 이상을 그린 작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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