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라디오

설리숲 2013. 2. 21. 00:36

 산골에 그나마 유일하게 문명의 언저리에 가까이 다가가 있던 것은 라디오였다.

 

 전기가 없었다. 저녁이면 등잔불을 켰다. 그 오래 전에는 어유를 썼다고 하는데 우리 시절에는 세기(석유)를 썼다. 그러고 보니 석유도 문명의 근처에 다가간 물건이긴 하다. 석유도 돈사야 했으니 그 알뜰함이야 이루 말할 수 없어 엄마는 행여 심지가 많이 올라올까 늘 살피면서 불이 꺼지지 않을 만큼만 삐죽 내밀었다. 그러니 밤은 늘 어두웠다. 그때도 초는 있어서 어쩌다 한번 켜는 때 그 밝음은 등잔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초를 켜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것도 돈사야 했으니까. 여름철엔 대부분의 생활을 마루에서 했다. 마루에서 등잔불을 쓰면 마당까지 빛이 퍼져 더 어두웠기 때문에 도저히 조명으로서 효용가치가 없었다. 게다가 실외라 바람이라도 불면 꺼지기 십상이라 여름엔 대청 바람벽에다 남포불을 걸었다. 남포는 등잔불에 비해 엄청 밝았다. 머릿속까지 깨끗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석유. 밝은 만큼 기름도 많이 먹었다.

 

 그 궁촌에 누구네가 제일 먼저 라디오를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그때 유행하던 노래들을 촌사람들도 다들 부르고 다녔다. 이 집 저 집 하나씩 라디오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나중에 전화기나 TV가 그랬던 것처럼 라디오는 일종의 부의 상징이었다. 라디오를 들여 놓으면 동리 사람들이 다들 몰려가 그것을 구경했다. 라디로를 가진 집은 일부러 소리를 크게 해서 과시를 하기도 했다. 개울 건너 길자네 집에서도 날마다 라디오 노랫소리가 건너왔다.

 동숙의 노래, 황혼의 부르스, 서울이여 안녕, 님 그리워, 너와 나의 고향 등이 당시 유행가였다. 청년들은 나뭇짐을 지고 내려오는 자욱길에서 너무나도 그님을 사랑했기에 하며 목청을 뽑았고 처녀들은 나물을 캐러 나갈 때나 버들잎 늘어진 개울가에서 빨래를 할 때 황혼이 질 때면 생각나는 그 사람~ 고운 목소리를 뽑았다. 꼬마였지만 나 역시 그런 노래들을 흥얼거리고 놀았으며 그때의 가사들을 평생 잊어 먹지 않는다.

 

 그러다가 어느 때 우리 집에도 라디오를 들였다. 여느 집은 손바닥만 한 트랜지스터라디오가 보통이었다. 그것은 라디오 본체보다 더 큰 건전지를 고무줄로 묶어 듣는 것이었는데 우리 라디오는 크고 번듯한 진짜 라디오였다. 트랜지스터라디오에서 나오는 모기소리가 아니라 깨끗하고 거창한 노래가 나오는 라디오였다. 아버지는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좋은 라디오를 사 오셨을까. 집안에서 매일 낳는 달걀도 돈 때문에 식구들이 먹지 못하는 애옥살이 살림에 그런 거창한 라디오는 정말 일대 혁명이었다. 아버지는 날마다 라디오를 즐겼다. 뉴스도 듣고 노래도 듣고 산골 밖의 세상을 듣보았다. 채널은 두 개 밖에 없었다. 강원방송과 춘천방송. 강원방송은 지금의 춘천MBC이고 춘천방송은 지금의 KBS춘천이다. 노래와 뉴스 말고도 재치문답이란 오락프로는 최고의 인기였고 제목은 잊어 먹었지만 김영훈 고춘자가 진행하는 민요노래자랑은 아버지가 제알 좋아하는 프로였다. 아버지는 그래서 장에 나갈 때마다 라디오약을 사 왔고 어느 때는 장에 갈 일이 없어도 라디오약 때문에 우정 장엘 다녀오기도 했다.

 

 어린 내게 라디오는 무척 신기했다. 고 네모나게 생긴 것이 어떻게 사람소리를 내고 있지. 여러 번 뒷 뚜껑을 열고 들여다보곤 했다. 거기엔 오밀조밀 희한하게 생긴 부품들로 가득했는데 나는 그것들이 사람이 인형처럼 굳어 다닥다닥 붙어 있으면서 라디오를 켜면 사람소리들을 내는 것이라고 흡사 만화 같은 환상에 빠지기도 했다.

아직 어렸던 나는 한참 말을 배우느라 모든 단어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라디오를 ‘나즘’이라 해서 누나들이 한동안 낄낄대며 놀렸던 기억이 난다. 그 라디오는 몇 년 후 춘천시내로 이사할 때도 가지고 갔다. 나중에 영어 알파벳을 배우고 나서 그 라디오 앞면에 HiFi라는 글이 씌어 있는 걸 비로소 알았다.

 

 라디오는 궁촌 산골에서 문명의 세계로 통하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석유도 아까워 어둡게 지내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때 되면 갈아 넣어야 하는 라디오약 때문에 더 곤궁해지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문명이란 그런 것이다. 없어도 별 상관없는 것들이 달콤함에 유혹되는 사람들의 습성을 교묘하게 건드려 더 많이 일하고 더 등골을 휘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쓰는 통신비는 어느 정도인가. 휴대전화 인터넷 등으로 지출되는 돈만 안 써도 우리 살림은 좀더 여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 없이 세상을 산다는 생각은 너무도 각박하다. 원시인이 아니라면 좀 빠듯하더라도 문화와 문명을 향유하며 그것에서 또다른 행복을 만끽할 수도 있는 거니까.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는데 꼭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을 위해서 예전보다 많은 노동을 해야 한다. 일하는 행동 자체가 행복이라면 모를까 과연 일이 행복하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렇더라도 내게 유년시절이 추억들은 아련하게 그립고 그것은 내 평생을 좌우하고 있다. 라디오의 추억도 그렇다.

 

 

 

                              

                                        문주란 : 동숙의 노래

 

 

'서늘한 숲 > 유년의 대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콩 타작  (0) 2013.11.19
가마솥  (0) 2013.02.23
공비였을까  (0) 2013.02.19
유년의 쥐  (0) 2012.03.18
메뚜기의 열정적인 사랑  (0) 2010.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