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렇듯 민소매에 반바지, 샌들 차림으로 아직 동살이 잡히지 않은 새벽에 길을 나섰다. 기온이 떨어진다는 예보는 들었지만 그래 봐야 여전히 여름이고 긴팔을 입을 만큼 추우려면 한 달이나 더 있어야 될 테니.
그 아침에 진짜 동사할 뻔 했다. 문 밖에 나섰다가 추우면 되들어와 옷을 껴입고 나가면 될 것을 무슨 자존심인지 버티고 말리라 하다가 큰 후회를 하고 말았다.
안날까지 그렇게 무덥고 찌더니 9월의 첫날은 그렇게 냉랭한 새벽으로 시작되었다. 혼잣말로 중얼거리기를, 한국은 4계절이 있다. 여름, 초겨울, 겨울, 초여름.
<서산 갯마을> 노래가 있지만 실제로는 서산에 이렇다 할 갯마을이 없다. 서쪽으로는 태안군이 바다를 죄다 차지하고 있고, 남쪽은 천수만을 매립한 드넓은 간척지요, 북으로는 가로림만이다. 간월도 부근은 마을이라기 보단 관광지에 가까운 곳이고 겨우 창리 포구가 그나마 바다에 접한 마을에 속한다. 그러나 그것도 서산 갯마을 이미지에 맞는 마을은 전혀 아니다. 가로림만으로 올라가면 군데군데 갯가 마을이 있긴 하지만 역시 노래에 맞는 마을은 거의 없다.
<서산 갯마을>이 나온 때가 60년대 중반이다. 그때는 태안이 없고 서해안 일대가 다 서산이었다. 그러므로 노래를 만든 사람의 갯마을은 지금의 태안 바닷가 어느 곳일 것이다. 1988년에 태안과 서산이 분리되어 대부분의 갯벌이 태안군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갯가 사람들의 생활은 척박한 것처럼 느껴진다. 태생이 산골인 내가 바닷사람들의 생활을 알 리 없지만 촌놈의 시선으로 보아 늘 바람을 맞아야 하는 그네들의 삶이 풍요로워 보이지는 않아 보였다. 어느 해 겨울 통영에서 굴 까는 일을 며칠 한 적이 있다. 아무리 남쪽 바다라 해도 바람은 몹시도 드세고 차가웠다. 손끝이 얼얼하게 얼어 하루 종일 고생했었다. 거기 아낙네들은 이른 아침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그 일을 하였다. 겨우내 그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렇지. 어디라고 삶이 팍팍하지 않을까. 사람의 한살이란 태어나서는 죽을 때까지 아등바등 그렇게 살게끔 운명 지워진 것이 아니겠는가.
새벽에 나올 땐 그리 춥더니 햇살이 퍼지자 제법 살겠다. 점심 때 가까워서는 햇살이 뜨거워졌다. 역시 아직은 여름이었다.
가로림만 왕산포에 <서산 갯마을> 노래비가 있다. 서산의 노래이니 어딘가 노래비는 세워야겠는데 그렇다고 태안 땅에다 세울 수는 없고, 궁여지책으로 정한 게 왕산포였던 모양이다. 전혀 그럴듯하지 않고 좀 궁색해 보였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가로림만의 일몰을 보고 싶었으나 저녁이 되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아무것도 준비해 가질 않았으니 그때까지 굶어야 할 판이었다. 왕산포엔 낚시꾼들을 위한 가게가 둘 있을 뿐 사먹을 만한 데가 없다. 한낮의 뜨거운 뙤약볕을 정수리에 받으며 다음을 기약하고 되돌아 나왔다.
가수 고 조미미의 1주기가 머지않은 날이었다. 이 노래 <서산 갯마을>은 원래 이미자의 노래였으나 그닥 빛을 못 보고 비로소 조미미의 노래로 크게 히트했다. 천하의 이미자도 못 살린 노래라니 무엇이든지 다 임자가 있고 맞는 궁합이 있는 모양이다.
작년 이맘때 조미미에 이어 이튿날 최헌의 작고 소식이 연이어 있어서 많이 우울했었다. 60~70년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 분의 노래를 흥얼거려 본다.
김운하 작사 김학송 작곡 조미미 노래 : 서산 갯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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