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 입구 외환은행 본점 건물을 왼쪽으로 끼고 명동성당 쪽으로 비스듬히 뻗어간 명동길을 걷다 보면 세월의 이끼가 낡고 앙상하게 묻어나는 3층 건물이 나타난다. 이 건물의 2층에는 놀랍게도 딜레탕트 박인환의 흔적을 기억이라도 하듯 ‘세월이 가면’이라는 간판을 내건 카페가 들어서 있다. 바로 이곳이 전후 문인들의 사랑방 노릇을 하던 ‘명동싸롱’이었다.
박인환은 이곳에서 문우들과 어울리다가 계단을 내려와 죽음이 휩쓸고 간 세월의 쓸쓸함을 술로 달래기 위해 맞은 편 대폿집 ‘은성’으로 향했다.
탤런트 최불암 씨의 어머님(이명숙)은 한국전쟁 직후 서울 명동에서 ‘은성’이란 주점을 경영했다. 지금의 유네스코회관 맞은 편 자리다.
통나무 의자에 사기그릇 대폿잔, 담배연기로 꽉 찼던 이곳은 예술인들의 아지트였다.
1956년 이른 봄 저녁이었다. 은성에 모여 앉은 박인환, 이진섭, 송지영, 영화배우 나애심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이 몇 차례 돌아가자 그들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졸랐지만 그녀는 좀체로 부르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박인환이 즉석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시를 넘겨다보고 있던 이진섭도 그 즉석에서 작곡을 하고 나애심은 흥얼흥얼 콧노래로 그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깨어진 유리창과 목로주점과도 같은 초라한 술집에서 즉흥적으로 탄생한 것이 오늘까지 너무도 유명하게 불려지고 있는 '세월이 가면‘이다.
한두 시간 후 송지영과 나애심은 돌아가고 임만섭, 이봉구 등이 합석을 했다. 테너 임만섭이 그 우렁찬 성량과 미성으로 이 노래를 정식으로 다듬어서 부르자 길 가는 행인들이 모두 이 술집 문 앞으로 모여드는 기상천외한 리사이틀이 열렸다.
마른 명태를 앞에다 놓고 대폿잔을 기울이면서 아름다운 시를 쓰고 작곡을 하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며 박수를 보내는 많은 행인들. 그것은 마치 낭만적인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은 순식간에 명동에 퍼졌다. 그들은 이 노래를 명동 엘리지라고 불렀고 마치 명동의 골목마다 스며있는 외로움과 회상을 상징하는 듯 이곳저곳에서 이 노래는 불리어졌다.
이 ‘세월이 가면’에는 알려지지 않은 애절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이 시를 쓰기 전날 박인환은 십 년이 넘도록 방치해 두었던 그의 첫사랑 애인이 묻혀 있는 망우리 묘지에 다녀왔다. 그는 인생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랑도 시도 생활도 차근차근 정리하면서 그의 가슴에 남아 잇는 먼 애인의 눈동자와 입술이 나뭇잎에 덮여서 흙이 된 그의 사랑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순결한 꿈으로 부풀었던 그의 청년기에 아름다운 무지개처럼 떠서 영원히 가슴에 남아 있는 것, 어떤 고통으로도 퇴색되지 않고 있던 젊은 날의 추억은 그가 막 세상을 하직하려고 했을 때 다시 한번 아름다운 빛깔로 그이 가슴을 채웠으리라.
그는 마지막으로, 영원히 마지막이 될 길을 가면서 이미 오랜 전에 그의 곁에서 떠나간 연인의 무덤에 작별을 고하고 은밀히 얘기하고 싶었다.
박인환은 세월이 가면을 쓰고 나서 한동안 흥분으로 세월을 보냈다. 부지런히 원고를 써서 몇 푼 원고료를 받지만 집에 떨어진 쌀을 살만큼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하염없이 쓸쓸한 얼굴로 명동백작이라 불리던 이봉구와 ‘신라의 달밤’을 잘 부르던 임궁재와 함께 국수 한 그릇에 술잔을 비우곤 했다.
불후의 명곡 ‘세월이 가면’이 완성되던 날 이진섭과 함께 어디서 그렇게 낮술을 많이 마셨는지 얼굴이 붉어 가지고 당시 단성사에 상영중인 캐서린 헵번 주연의 <여정>을 보고 싶었으나 돈이 없어 못 가고 ‘세월이 가면’을 애처롭게 술집에 앉아 불렀다.
그리고 사흘 후 친구인 김훈한테 짜장면 한 그릇을 얻어먹은 박인환은 술에 만취되어 집에 와 잠을 자다가 심장마비로 31세의 아까운 인생을 마감했다.
세탁소에 맡겨둔 봄 외투도 돈이 없어 못 찾고 두꺼운 겨울외투를 그대로 입은 채였다. 무슨 이유에선지 눈을 감지 못하여 부음을 받고 맨 처음 달려온 친구 송지영이 감겨 주었다. 생전에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못 사주었다면서 김은성이 조니워커 한 병을 죽어 누워 있는 박인환의 입에 부었고 다들 울었다.
그의 상여 뒤로 수많은 선후배들이 따랐고 공동묘지까지 따라온 친구 정영교가 카멜 담배와 조니워커를 그의 관 위에 부어 주었다. 모윤숙 시인이 고인의 시를 낭독하였고 친구인 조병화 시인이 조시를 읽었다.
인환이 너 가는구나
대답이 없이 가는구나
너는 누구보다도 멋있게 살았고
멋있는 시를 쓰고……
- 시인 강계순의 <아! 박인환> 중에서 -
고등학교 때 난데없이 목마와 숙녀 열풍이 불었었다. 아이들이 시를 적어 갖고 와서는 서로 읽거나 토론을 하기도 했다. 난 소설가를 꿈꾸는 소년이었다. 그깟 시 따위는 관심이 없어 한번도 귀 기울여 들어보질 않았다. 당시 심야 라디오프로를 많이 듣던 시기였다. 아마 거기서 들었을 테지. 그런데 그런 현상은 다른 학교 여학생들에게도 벌어지고 있는 거였다. 조용필의 고추잠자리 노래처럼 시가 대유행하는 거였다. 그래서 알아낸 하나가 <목마와 숙녀>는 제목이었다.
나중에야 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되는 과정에 일어나는 한 과정임을 알았다. 감수성이 풍부한 그 또래라면 누구도 한 편 정도의 시는 암송하게 마련이고 그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시가 바로 <목마와 숙녀>였다. 그것만 해도 우리 시대는 제법 낭만이 묻어 있었다. 요즘처럼 게임이나 스마트폰으로 하루해를 보내는 아이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박인환. 모더니즘문학의 대표적 시인인 그를 우리는 교과과목에서 한번도 들어보질 못했다. 아마 그것도 시류와 정치적인 이유가 원인일 것이다. 모더니즘의 특징이 현 세태에서 벗어나 좀더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는 주의라 독재정권의 입장에서는 불온한 사상이라 매도할 여지가 있다. 김수영이나 박인환의 시가 교과서에 실린 건 오랜 세월이 지난 후다.
요즘 아이들도 목마와 숙녀를 읽으면 한번쯤 절절한 가슴앓이를 할까.
세월이 가면 이 시가 너무 좋아 학창시절 어느 때 이 시를 가지고 곡 하나를 만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나는 예전에 예술적으로 참 재능이 많았던 것 같다. 그림도 그리고 기타도 치고 작곡도 하는 문학소년이었다.
지금도 나는 자작곡의 그 노래를 다 부를 수 있다.
나중에 현인과 박인희의 이 노래를 알고 나서 내 노래가 많이 미천하다는 걸 자각하긴 했지만.
인제읍에 박인환문학관이 있다.
조락의 계절이다. 그의 시처럼 벤치 위에 나뭇잎이 떨어지고 또 덮이는 깊은 가을이다.
문학관엔 그가 고뇌하고 방황하던 서울 옛 명동거리를 꾸며 놓았다. 모더니스트 문인들의 사랑방이자 모더니즘의 산실 마리서사, 모더니즘 시운동의 시초가 된 선술집 유명옥, 찬란한 명동 예술인들의 삶의 휴게소 동방싸롱, 명동백작 댄디보이들의 포엠, 전후 명동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연 다방 모나리자, 그리고 즉흥적으로 세월이 가면을 쓴 은성 등이 불빛 희미한 외등 아래 죽 늘어서 있다.
박인환을 이야기하려면 인제가 아니라 서울 명동을 헤매고 다녀야겠지만 이미 명동은 예전의 흔적이 없다. 인제는 박인환의 고향이다.
사람은 가도 옛날은 남아 그의 고향에 이나마 그를 추모하는 공간이 있어 떠난 사람의 희미한 자취를 어루만져 본다.
아 깊은 가을이다.
박인환 시 이진섭 작곡 박인희 노래 : 세월이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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