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노래를찾아떠나는여행

한계령

설리숲 2013. 11. 10. 12:39

 

 

 

 

 

 공연히 쓸쓸하고 울적할 때면 한계령에 가고 싶다.

 위대한 산이 주는 위압감에 한 번 몸을 짓눌리고 싶다. 예전에 허구한 날 오르내리던 때가 있었다. 어느 것 하나 거칠 것 없이 아름답던 청춘시절에도 가끔은 심신이 피로해 느닷없이 행장을 차려 떠나곤 했었다.

 

 17~18년 전 가을 어느 날에 역시 그렇게 행장을 차리고 동해바다로 가다가 한계령에서 광대무변 대자연의 진리를 만났다.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부분일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태양의 삼분의 일이 가려지는 초유의 우주쇼였다. 세상이 어둑어둑해졌다. 경외감과 두려움. 태양의 존재가 얼마나 위대한가. 어느 날 슬그머니 우주에 이변이 일어나서 저 태양이 사라진다면. 인간이 고상하고 높은 학식을 갖추고 철학을 논하며 천리에 통달한 듯 뻐기지만 대우주, 아니 기껏 지상 천 미터 위에서 내려다보는 인간의 세계는 미천하고 저열한 것이다.

 길지 않은 부분일식의 어둠이었지만 그 시간동안 느끼는 두려움은 영원할 것 같았다. 우주의 영원한 세월 앞에 인간의 극히 짧은 인생은 또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바다로 가는 길을 포기하고 하루 종일 한계령에서 벌레 같은 인간의 생을 성찰했던 기억이 있다.

 평소에 무심히 넘나들던 한계령이었는데 그날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는 산맥은 참말 장엄하고 위대하게 다가왔다. 그 계곡을 굽이굽이 오르는 차들의 힘겨움이 새삼 안쓰럽게 느껴졌다. 다 부질없다. 이 꼭대기에서 바윗돌 하나 굴러 내려가면 죄다 사라지고 말 것 같은 인간의 나약함이란.

 

 막연히 간직하고 있던 생각이 그날 더욱 절박해져서 얼마 후 사표를 내고 조용하게 들어가 살 집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직장과 사람들, 그것들과 관계된 일체 생활들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 보였던 것이다.

 

 

 한계령.

 오랜 만에 올라선 그 고개에서 느끼는 감회,

 그러나 세상은 여전하고 인간의 마인드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어쨌든 흘러갈 테고 종국엔 흔적 없이 사라지겠지. 수없이 이곳을 거쳐 갔던 옛 사람들처럼. 오욕칠정, 즐거움과 방황 같은 건 순간이야. 이 고개에서 내려다보면 다 우습지 않은가.

 

 한계령.

 이 노래는 자꾸만 눈물 나게 한다.

 저 아래에서는 단풍 들었다고 가을이라고 좋아들 하는데 한계령은 이미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한계령에서 1

                                 정덕수

 

 온종일 서북주릉(西北紬綾)을 헤매며 걸어왔다.

 안개구름에 길을 잃고               

 안개구름에 흠씬 젖어 오늘,

 하루가 아니라 내 일생 고스란히

 천지창조 전의

 혼돈 혼돈 중에 헤매일지.

 삼만육천오백 날을 딛고

 완숙한 늙음을 맞이하였을 때

 절망과 체념 사이에 희망이 존재한다면

 담배 연기빛 푸른 별은 돋을까

 

 저 산은,

 추억이 아파 우는 내게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하고

 발 아래 상처 아린 옛 이야기로

 눈물 젖은 계곡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구름인 양 떠도는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홀로 늙으시는 아버지

 지친 한숨 빗물 되어

 빈 가슴을 쓸어 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온종일 헤매던 중에 가시덤불에 찢겼나 보다

 팔목과 다리에서는 피가 흘러

 빗물 젖은 옷자락에

 피나무 잎새 번진 불길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애증(愛憎)의 꽃으로 핀다

 찬 빗속

 꽁초처럼 비틀어진 풀포기 사이 하얀 구절초

 열 한 살 작은 아이가

 무서움에 도망치듯 총총이 걸어가던

 굽이 많은 길

 아스라한 추억 부수며

 관광버스가 지나친다.

 

 저 산은

 젖은 담배 태우는 내게

 내려가라

 이제는 내려가라 하고

 서북주릉 휘몰아온 바람

 함성 되어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 1981년 10월 3일 한계령에서 고향 오색을 보며

 

 

 

 

                                                   정덕수 시 하덕규 작곡 양희은 노래 : 한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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