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노래를찾아떠나는여행

절망과 열망, 연안부두

설리숲 2013. 10. 8. 00:48

 

 

 

 

 한 때 금속노동자였다.

 인천의 어느 삭막한 공단의 삭막한 공장에서 숟가락에 광을 내고 있었다. 일이 끝나고 나면 전부들 얼굴과 작업복에 거뭇하게 먼지를 뒤집어 쓰곤 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맹목적으로 시간되면 일어나 출근하고 시간이 되면 비척거리며 자취방으로 향했다.

 그 해는 인천의 공단만 삭막한 게 아니고 이 나라 전체가 삭막했다.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는 군사정권을 이으려고 부단하게 머리를 굴렸고 민중들은 그를 몰아내기 위해 곳곳에서 고개를 쳐들었다. 군부종식 호헌철폐를 외치며 대학생 노동자 농민 넥타이들이 연이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나라는 황망함 그 자체인데 때를 맞춰 전국서 들불처럼 노사분규가 번져 사업장이란 사업장은 태업 파업 여기도 시위 저기도 시위 거리마다 아우성이요 골목마다 선동적인 벽보 일색이었다.

 

 삭막한 공단의 생활에서 우리의 탈출구는 술이었다. 밤근무를 마치고 번연히 동이 터 오는 횡단보도를 건너 해장국집엘 들어가면 이미 거나하게 취기 돈 노동자들의 굽은 어깨들이 부연 눈들을 하고 주절거리고 안자아 있곤 했다.

 우리 공장도 시류를 타고 대대적인 파업농성에 돌입하면서부터는 동료를 불러내 그 해장국집에 들어앉아 소주를 마시거나 더 자주는 연안부두엘 나갔다. 비릿한 해물냄새와 퀴퀴한 시궁창냄새 따위가 한데 버무려진 추접한 그곳이지만 그나마 바다로 뚫린 공간이 있어 노동자들의 때묻은 가슴이 잠시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했다. 그곳서도 뭐 할 일이 있겠는가. 그저 허름한 대폿집에 들어앉아 값싼 김치찌개 놓고 노동자답게 마시는 것 뿐. 평생을 마셔온 술이지만 여전히 소주 두잔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는 내가 참으로 술을 즐기던 나날이었다. 외형과 내면이 모두 금속노동자였었다.

 연안부두로 가는 12번 버스가 송림동 용현동을 거쳐 가는 동안에도 거리에는 온통 시위대로 넘실거렸다. 파업시위대 군정종식 시위대가 얽힌 대혼란의 틈을 비집고 버스기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유유히 빠져다녔다.

 동료들은 시급 400원을 올려달라고 악을 써대며 밤을 새울 때 나는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를 먹고 골목길에 엎드려 게우곤 했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무슨 일을 한단 말인가. 그저 눈 뜨면 아침이 오고 나달이 가면 어디로든 흘러가겠지. 누가 이기든 나는 개의치 않을 거다. 그래 봤자 나는 선거 때 되면 노태우 찍을 거다 이놈들아. 400원... 나는 일당 더 올려 받지 않아도 지금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월급이면 매일 소주를 마셔도 1년을 먹을 수 있단 말이다. 내겐 분에 넘치는 돈이란 말이다 이놈들아. 그러면서 나는 연신 먹은 것을 게워 냈다. 눈물이 비져 나와 세수 안 한 얼굴이 얼룩덜룩하거나 말거나 나는 알 수 없는 서글픔에 목울대를 쿨럭이며 흐느끼기도 했다.

  

 

 

 

 

 아 연안부두!

 젊은 시절의 내게 연안부두는 삶의의 무게였고 어둠에 가려진 그늘이었다. 바다는 기름에 절어 악취가 진동했고 정박해 있는 배에서 나오는 자들도 죄다 퀭한 눈의 촛점 없는 자들이었다. 세상은 희망 없는 노동자들만 구성된 집단이었다.

 

 우리의 일탈은 술 아니면 연안부두가 고작이었다.

 내겐 탈출구가 더 있었는데 바로 야구였다. 특별히 야구란 스포츠를 좋아한 것도 아니건만 가끔 시간을 내 인천연고인 돌고래팀을 응원하기 위해 야구장을 찾곤 했다. 인천팀이라서 돌고래를 응원한 건 아니었다. 돌고래는 강원도 팀이기도 했다. 처음 프로야구가 출범할 때 인천과 경기 강원지역을 아우르는 연고팀이 슈퍼스타 팀이라고 분명 못을 박았고 그렇게 알고 있었기에 삼미 슈퍼스타에 이어 청보 핀토스를 응원했고 그 뒤 태평양이 인수한 돌고래가 나의 팀이었다. 슈퍼수타 핀토 돌고래로 이어지는 동안 나의 팀은 한번도 우리를 열락에 빠지게 한 적기 없다. 늘상 꼴찌자리를 차지했고 어쩌다 성적이 좋으면 5등이 고작이었다. 빙그레 독수리 팀이 창단되고부터는 7위가 붙박이었다. 신생팀이면서도 독수리는 훻훨 잘도 날았다. 한국시리즈에 올라가서 매번 호랑이에게 당하긴 했지만서두 정규리그에선 항상 최강이었다.

 동료 중에 충청도에서 온 친구가 있어 가끔 돌고래와 독수리의 경기를 보러 가곤 했지만 단 한번도 이겨 기분 좋게 나온 적이 없었다.

 돌고래팀의 응원가가 바로 <연안부두>였다. 오래 전에 불렸던 구닥다리 노래가 응원가로 쓰일 줄이야. 한데 그것도 뭐 나쁘진 않았다. 거인은 <부산 갈매기>였고 호랑이는 <남행열차>였으니 그쪽도 그리 신식 노래는 아니었으니까.

 돌고래에 이어 팀은 유니콘이 되었고 우리는 그때서야 가장 환상적인 열락을 즐기게 되었다. 유니콘은 늘 우승후보였고 매번 한국시리즈에 나가 떼어 놓고 우승을 하곤 했다. 한국야구 역사상 가장 강한 팀으로 기억될 유니콘이었다.

 그후로 비룡이 인천의 주인으로 들어앉으면서 우리의 응원가 <연안부두>도 더이상 부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유니콘의 후신 격인 영웅이 우리의 팀으로 다시 등장했지만 과거 돌고래 때처럼 약팀의 대명사로 전전하기를 여러 해,

 그 영웅 팀이 드디어 가을 축제의 주인공이 되었다.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면 한 경기 정도는 가볼까 어쩔까.

 

 

 

 

 

 

 

 오랜 세월이 지났다. 연안부두는 여전히 추레하다. 대신 웅장해졌다. 공장 부두 항만시설 등의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인천이라는 광역시의 위엄을 확인한다.

 12번 버스는 26년이 지난 지금도 똑같은 코스로 부평과 연안부두로 드나들고 있다.

 

 바다 끝에 서서 들고나는 배를 보고 있으면 자꾸만 멀리 떠나고 싶다. 국제여객터미널에 가면 단동이니 영구니 돈만 내면 금방이라도 떠날 수 있는 항구의 이름과 뱃시간이 보인다. 번잡하게 드나들며 알아들을 수 없게 희노애락하는 중국인들의 모습이 더욱 충동을 준다. 아.

 

 젊은 날의 연안부두는 치기 어린 절망이었고 나이 먹어서 다가오는 연안부두는 미지의 세계로의 열망이다.

 

 

횟집거리

 

인천대교

 

연안부두 노래비


 

 

                          조운파 작사 안치행 작곡 김트리오 노래 :연안부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