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노래를찾아떠나는여행

내 마음은 호수요

설리숲 2013. 8. 10. 23:23

 

 김동명 시인(1900~1968)의 출생지인 강릉에 그의 생가 복원과 더불어 문학관을 설립했다. 건물 외관에 비해 전시자료가 아직은 많지 않아 조촐해 보인다.

  어디를 가든 그 지역 문화인물을 선양하는 기념관 등이 있는데 특히 생가라고 복원해 놓은 걸 보면 실제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초가집이라고 해서 기껏 초가지붕만 얹었지 집 자체는 너무 번듯하다. 기둥 보 서까래 황토벽까지 관광용 건축물임이 한눈에 보인다. 게다가 천장 등 집의 높이도 엄청 높다. 우리가 살던 초가의 천장은 키 큰 사람이 들어서면 머리가 닿을 정도이다. 복원은 말 그대로 복원이어야지 세련되고 거창한 것으로 치장한다면 별 의미가 없다.

 

 

 김동명 생가도 역시 그렇다. 급조한 태가 나고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너무 새 집이다. 정감이 안 간다는 말이다.

 생전 김동명은 가난하되 불우하지는 않겠다는 인생철학을 지녔다 한다. 김유정처럼 폐병, 고독에 시달리지 않은 밝은 생활을 했다. 멘델스존의 음악이 밝고 명랑한 것은 그의 생활이 즐거웠던 까닭이다. 김동명의 서정시는 그래서 풍부한 감성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시인의 철학이라면 동퇴서비의 오두막집이라도 결코 불우하지 않았으리니 생가를 복원할 때도 그 점을 참조했더라면 좋았겠다 싶다.

 

 

 

 

 

 학교에서 <파초>를 공부할 때는 조국애에 대한 시라고 배웠는데 실제와는 좀 괴리가 있는 것 같다. 김동명은 민족시인라기보다는 낭만적인 서정시인에 속한다. 파초는 그가 꿈꾸는 여인을 상징한 것이겠다.

 고교 때 합창부가 있었는데 강당에서 <내 마음>을 연습할 때 은은히 흘러나오는 남저음 화음이 제법 듣기 좋았던 기억이다.

 

 

 이런 옛 문인들을 찾아가 만나는 것이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가서, 그가 고뇌하던 시대의 아픔을 엿보기도 하고 그가 누에처럼 뽑아내던 작품의 향을 맡을 때 마치 나 역시 그와 동일한 시대에 서서 어느 거리를 걷고 있는 환상에 빠져 본다. 그럴 때의 내 등에도 무거운 삶의 무게가 얹혀 있기를 바라기도 한다. 지금 나는, 내 삶은 너무나 가볍기 때문이다. 빈 지게를 지고 경박스럽게 걷느니 적당히 짐을 얹고 진중하고 느리게 걸어가야 하는데.

 

생가에 시인의 상징과도 같은 파초를 심었는데 아직은 어린 잎이다.

부디 넓은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게 무성하게 우거졌으면 좋겠다.

그때가 되면 문학의 향기 또한 진하게 풍겨 나오리.

 

 

 

 

 

 

 파 초(芭蕉)                       

                                        김동명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南國)을 향한 불타는 향수(鄕愁)

 너의 넋은 수녀(修女)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김동명시 김동진 곡 박세원 노래 : 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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