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노래를찾아떠나는여행

수덕사의 여승

설리숲 2013. 7. 29. 19:58


 돈도 싫고 사랑도 부질없소

 여인들의 애증이 투영된 곳.

 

 모던걸로 불리며 자유분방한 생각과 언행으로 많은 지탄을 받는 한편 일각에선 시대의 선각자라는 호의를 더불어 안았던 신여성. 타의에 의한 개화로 인한 이런 물결은 한때 큰 사회적 문화적 조류였다. 김활란 나혜석 김일엽 윤심덕 등은 그중에서도 우리가 잘 아는 인물들이다. 그들이 그렇게 조류의 한 흐름을 탈 수 있었던 건 당연 개화였다. 그래서 다는 아니라도 대개 고리타분한 조선을 부정하고 세련되고 고상해 보이는 일본을 동경할 수박에 없었을 것이다. 친일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부류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불행한 세대였다고 일말의 동정을 보낼 수도 있다.

 

 

 

 

 

 수덕사는 뜻하지 않게 이러한 신여성과 아울러 페미니즘을 상징하는 장이 된듯한 느낌이다. 비구니 선원인 견성암이 있고 실제로 나혜석과 김일엽이 이곳과 깊은 인연을 맺고 일생을 마치기도 했다. 그것보다도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대중가요로 인해 수덕사가 비구니사찰이라는 인식을 주기에 충분하다. 나 역시 그런 줄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수덕사는 비구니 절이 아니다.

 

 단지 새로운 마인드와 과거의 사고를 부정하는 것으로 개화되었다고 할 수는 없겠다. 일부 천박한 사람들이 마치 문란한 이성행각을 자유분방한 연애로 착각하고는 이혼을 훈장처럼 달고(이건 이문열의 표현이다) 버젓이 사회의 지도자인 줄로 아는 병폐를 낳기도 한다.

 

 수덕사는 한국에서도 몇 안 되는 천 년 고찰이다. 천 오백년이 되었고 80여개의 말사를 거느리고 있다고 한다. 사찰의 이런 개요보다도 우리는 이곳을 거쳐 간 그 여인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곤 한다. 실제로 수덕사라 하면 그들의 이야기가 더 흥미로운 것이다.

 

 동경유학 중에 만나 결혼한 남편과 이혼하고 수덕사 견성암에 와서 출가를 한 김일엽이나 자자한 염분을 뿌리면서 세간의 화제를 몰고 다녔던 나혜석이 사랑에 상처받고 안식처로 찾아왔던 이야기. 또 이들과 교분을 맺은 화가 이응로와 그의 부인들 이야기까지. 이미 많이 알려진 유명인사들의 이 일화들이 얽힌 수덕사 그리고 수덕여관.

김일엽은 엄마를 찾아 바다를 건너온 아들을 한번도 따뜻하게 안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글쎄다. 가장 원초적인 자식과의 사랑을 부정하면서 더 높은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부처를 향한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혜석도 이곳에서 귀의를 하려 했다 한다. 그러나 만공 스님의 강렬한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니가 중질을 하기엔 지나치게 감성적이고 애정이 넘친다는 거였다. 에미에게 버림 받은 일엽의 아들을 대신 엄마처럼 보듬어 주며 날마다 젖가슴을 내주었다고 하니 만공 스님의 지감이 옳긴 옳았다.

 

 

 

 

 그러나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이곳에 얽힌 여인들 중에 진정으로 페미니스트는 이응로의 부인인 박귀희 여사라고 본다. 이응로가 인수한 수덕여관은 부인 박귀희 여사가 운영했다. 화가야 늘 그림에만 빠져 있으니 경제관념이란 게 있을 리 없다. 화가가 아주 어린 제자를 사랑하고 더불어 프랑스로 가 버린 뒤에도 박귀희 여사는 묵묵히 인내하며 기약도 없는 남편을 기다렸다. 동백림사건으로 투옥된 뒤에도 변함없는 애정으로 옥바라지를 했다. 혹자는 이런 패배적인 여인을 욕할지 모르나 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여인인가. 결국 세월이 흐르고 나면 강렬했던 열정은 사라지고 말며 지극하고 숭고한 사랑은 영원히 남는 것이다. 우리에게 박귀희 여사는 그렇게 고귀한 여인으로 남아 있지 않은가. 그토록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야 진정한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남편의 사망 후에도 여사는 오랜 인고의 세월을 혼자 견디었다. 여사가 돌아가시고 난 후 수덕여관은 아무도 돌보지 않아 방치되어 있다가 최근에 수덕사에서 관리를 위임받아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한여름인데도 비 오고 스산한 바람이 부니 제법 서늘하다. 예전에 왔을 때 절이 지나치게 호화롭다는 첫인상을 받았는데 이제 와 보니 꼭 그렇지는 않아 보였다. 전에는 수덕여관을 지나서 매표소가 있어서 여관만 보려는 사람들이 굳이 돈을 내지 않아도 되었는데 지금은 훨씬 아래 매표소가 있어서 반드시 돈을 내야 한다. 돈독이 오른 것 같은 절측의 소행이 섭섭하지만 여관을 수덕사가 관리한다 하니 그대로 눈감아준다.

 

                                                  견성암

 명색은 암자인데 이렇게 규모가 큰 암자라니. 암자라기 보단 선원이라는 간판을 거는 게 적절하겠다. 그렇더라도 너무 호화롭다는 생각은 버릴 수가 없다.

 김일엽이 이곳에서 수행하며 수계를 받았다. 견성암 최초의 비구니라 한다. 재미있는 건 김일엽도 <수덕사의 여승>을 부른 가수 송춘희도 원래는 기독교인이었는데 개종했다 한다. 송춘희는 단순히 자신의 히트곡 때문이라 하니 사람의 인생전환은 ‘팔자’라는 단어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다. 송춘희의 법명은 백련화이고 지금껏 백련장학회를 이끌어오면서 회향을 하고 있다고 한다.

 

 견성이라.

 깨달음을 보았는가.

 

 

 

 

                                      김문흥 작사 한동훈 작곡 송춘희 노래 :수덕사의 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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