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아침 토함산은 천년의 비밀을 지키려는 듯 자욱한 안개에 쌓여 신비한 매력을 발했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타려고 일찍 눈을 떴는데 너무 일찍 일어났다. 첫차를 타더라도 시간이 남는다. 여관에서 나와 걸어간다. 하긴 콜택시나 히치하이킹 아니라면 마땅한 교통편도 없다. 걸어도 한 시간이면 충분하고 그래도 시간이 남는다.
아주 오랜 전에 석굴암을 올랐었다. 전혀 기억이 없다. 수학여행길이었다. 선생님의 잔소리에 눈 비비며 일어나 건성건성 대절버스를 타고 올랐지만 그 풍광이라든가 세계의 유산이라는 석굴암이 전혀 기억에 없다. 여행은 스스로 바라고 얻기 위한 준비를 가진 후라야 그 의미가 있다. 단체로 몰려 다니며 관심도 없는 것을 돌아보는 것은 당연 기억에 남질 않는다.
그날 아침의 편린 중 생각이 나는 딱 하나는 엉뚱하게도 교생선생님에 대한 성적인 희영수다.
그제나 이제나 남자고등학교엔 여대 교생실습생은 배치하지 않는 게 좋다는 생각을 한다. 그 또래의 남자아이들은 여자를 보는 시선이 정상적이지 않다. 언제나 성적인 관념으로 보고 생각한다. 그런 소굴에 앳된 여대생을 넣어 놓으면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아닌 암컷과 수컷의 관계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불미스런 사건이 일어나는 건 아니다. 단지 존경받아야 할 교생선생님이 한낱 성적인 대상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 찜찜한 것이다. 생애 두 번째로 오르는 토함산 길에서 떠올리는 추억이란 게 고작 이따위라니 나도 참 올바른 놈은 아니다.
생각하면 토함산은 겉모양은 여느 산과 똑같은 산에 지나지 않는다. 산세가 빼어난 것도 아니고 해발이 높은 것도 아니고 웅숭하거나 웅자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내 관념 속에는 뭔가 다른 신비한 것들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다가온다. 계룡산을 떠올릴 때 어떤 종교적인 신령스러움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토함산은 종교적인 색채보다는 역사적인 성지 같다고나 할까. 신라의 고도였을 뿐더러 이미 우리가 역사시간에 귀가 아프게 배운 불국사 석굴암을 끌어안고 있으니. 그리고 토함이라는 이름에서 표현하지 못할 어떤 강렬한 기운이 풍기기도 한다. 그래서 여느 다른 산과 다름없지만 왠지 함부로 범하지 못할 위압감을 느끼곤 한다. 송창식의 노래 <토함산>에서 장중하게 울려 퍼지는 목탁소리와 함께 천년의 세월을 넘나들며 그 원대한 힘을 노래한 가사가 새록새록 뒷받침해 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날 아침 토함산 능선엔 자욱한 안개가 서려 천년 전으로 거슬러 온듯 그 신비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래 불국사에는 벚꽃을 비롯해 화려한 꽃잔치이더니 중턱으로 오르면서 산은 황량하고 쓸쓸해 그제서 비로소 수줍은 꽃망울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직은 쌀쌀한 3월의 아침.
석굴암에 현금인출기가 있어야 할까
기억에도 없는 옛날의 석굴암을 비로소 다시 보게 된다. 석불의 아름다움은 아침햇살을 받는 미간이라 하더니 지금은 인공구조물로 다 둘러쳐 놓아 햇살이 들어갈 틈이 없다. 부처님을 깊은 골방에 가둔 셈이다. 천년의 미소가 어정쩡한 썩소가 돼 버렸다.
석불은 언제까지 저렇게 앉아 있을까. 앞으로 천년을 더 버틸 수 있을까. 천년 후의 석굴암 건물은 어찌 변해 있을 것이며 토함산은 또 어떤 기세로 앉아 있을는지. 설마 중장비들에 의해 야금야금 쓸려 그 흔적조차도 사라져 버려 먼훗날 석굴암지(石窟庵址)라는 팻말만 서 있는 건 아닐는지. 천박한 인간들 하는 짓이 워낙 경박하고 자발머리없어서.
토함산
김현수
토함산에 올랐어라 해를 안고 앉았어라
가슴속에 품었어라 세월도 아픔도 품어 버렸어라
터져 부서질 듯 미소짓는 님의 얼굴에도
천년의 풍파세월 담겼어라
님들의 하신 양 가슴속에 사무쳐서 좋았어라 아하
한발 두발 걸어서 올라라 맨발로 땀 흘려 올라라
그 몸뚱이 하나 발바닥 둘을 천년의 두께로 떠바쳐라
산산이 가루 져 공중에 흩어진 아침
그 빛을 기다려
하늘을 우러러 미소로 웃는 돌이 되거라
힘차게 뻗었어라 하늘 향해 벌렸어라
팔을 든 채 이대로 또다시 천년을 더 하겠어라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찾는 님 하나 있어
천년 더 한 이 가슴을 딛고 서게 아하
김현수 시 송창식 작곡 송창식 노래 : 토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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