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이 문화적으로 소외되었다고 하지만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문화가 시골을 소외한 게 하니라 시골사람이 문화를 소외하고 있다는. 적어도 내 경우는 그렇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는 버려야 하는 것. 두 가지를 함께 취할 수는 없다. 시골의 맑은 바람과 정서를 얻고자 낙향하여 사는 사람은 도시에서 누리는 것들을 포기하는 것이다. 어느 여자가 귀농하여 살고 싶은데 단 한 가지 뱀을 무척 싫어하는데 그것만 없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것 참! 뱀이 있다는 건 생태계가 살아있다는 의미고 뱀이 없는 죽은 땅에서 귀농살이 잘도 하겠다!
시골에 사는 연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를 비롯한 한 부류는 도시의 것들을 거부하고 사는 부류이다. 그러므로 도시에서 누리는 문화적인 갈증을 도외시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문화가 시골을 소외하는 것도 맞다. 우선 돈이 안 되니까. 시골사람이 후진 촌놈들이라서가 아니라 인구가 적어서다. 문화를 향유하려는 사람이 10퍼센트라고 하면 100만의 도시에선 10만 명이, 만 명의 읍에서는 천 명이 그들이다. 당연 돈이 되질 않겠다.
정선에서 오래 살다 보니 문화적으로 낙후된 곳이란 걸 실감하겠다. 그 흔한 영화관 하나 없다. 그러니 저녁 날이 저물면 읍내 거리는 텅 비어 깊은 한밤중인 것 같다. 해 떨어지면 그때 비로소 몰려나오는 도시와는 대조적인 정서다. 갈 데가 없다.
가끔은 문화적인 갈증이 솟기도 한다. 그래서 서울이나 춘천 등으로 콘서트를 다녀오기도 한다. 인근의 강릉도 도시이건만 그리 여건이 좋진 못하다. 이 스무골을 나가면 도시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건 그 이유가 크다. 춘천이나 청주 정도가 참 좋다.
이 벽촌에서 서울팝스오케스트라 콘서트가 있었다. 수준 높은 연주를 한다는 인지도 있는 오케스트라다. 바이올린이 있고 더블베이스가 있고 오보에가 있는 번듯한, 시쳇말로 고급음악을 하는 연주단과 강원도 감자바위 그중에서도 가장 촌이라는 정선은 거리가 있어 보인다.
연주회에 가면 으레 그렇듯이 지휘자의 손이 올라가면서 오프닝곡이 시작할 때의 감정이 가장 절정인 것 같다. 이번엔 리하르트 슈베르트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서곡을 열었다. 그 첫 설렘에 가장 걸맞는 레퍼토리다. 장중하고 비장한 곡이다.
아무리 벽촌이어도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라. 객석이 다 찼다. 관객의 대부분은 젊은 학생들이다. 시골에 젊은이가 없다고 늘 푸념을 해대지만 잠시 살았던 함양에서 2002년 월드컵 때 거리로 쏟아져 나온 젊은이들의 물결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느꼈었는데 이번에 객석을 가득 메운 젊은이들을 보고도 역시 감동을 받았다. 요즘 유행어로 “살아 있네!!”였다.
또한 관객 매너 역시 여타 도시의 콘서트에서와 다르지 않은 세련된 수준이었다.
베이스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배치도에서도 가장 뒷자리에 위하는 콘트라베이스. 주선율을 연주하는 바이올린에 비해 주목도 받지 못하고 인지도 낮아 보이는 그들 연주자들. 의자는 있어도 연주 내내 한 번도 앉을 수가 없다. 악기가 워낙 크니 서서 연주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오케스트라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베이스주자들. 전면에 나서지 못하지만 음악의 가장 밑바닥을 받쳐 울려주는 서글픈 더블베이스 콘트라베이스.
구석구석 안 보이지만 어디든 살아 나름대로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지방 각지의 촌사람들도 결국은 한 사회와 국가를 형성하고 있는 베이스 같다는 생각을 한다. 만약 시골에 아무도 없고 도시에만 전 국민이 산다는 상상을 해 보면.
이번 연주회 레퍼토리에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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