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음악 이야기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좀 건네 주게

설리숲 2013. 6. 19. 23:58

 

 오늘도 아우라지 물은 흘러간다.
 그 옛날 이 강을 타고 유장하게 흘러간 음악이 있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 주게 

 

 아리랑 후렴구는 대개 고개를 넘어가는데 정선아리랑에서는 나를 넘겨 달라고 한다. 지극히 수동적인 이 아리랑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가락도 지나치게 늘어져 듣고 있노라면 식상하고 영 재미가 없다.
 그래도 이 아리랑은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과 더불어 한국의 삼대 아리랑으로 꼽힌다.
 보통 민요라고 하면 언제부터 불리어졌는지 기원이 없다. 한국의 대부분 민요들이 그렇다. 유독 정선아리랑은 확실한 기원이 있다.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쿠데타의 당위성과 명분이 절실했다. 그래서 옛 왕조의 인물들을 대거 기용하는 융화책을 썼다. 그래서 일부는 신왕조에 입각하여 영달을 누렸지만 또다른 일부는 불사이군의 충절을 고집하면서 끝내 이성계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개성 서쪽의 송악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72명이라고 하는데 이들이 은거하던 곳이 두문동(杜門洞)이었다. 그래서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의 기원이 되었다.
 이성계는 여러 번 이들을 회유하였으나 끝내 말을 듣지 않고 나오지를 않자 화가 나서 이곳에다 불을 질렀다고 한다. 은자들은 대부분 타 죽고 간신히 살아 남은 사람들은 정선 사람 전오륜을 따라 강원도 깊은 산골로 은거지를 옮겨 갔다. 전오륜을 비롯해 김충한 고천우 이수생 신안 변귀수 김위 등 7명이라 하며 이들은 이곳에서 평생을 산나물 등으로 연명하며 고려 왕조를 그리워했다 한다.
 현재 사북에서 태백으로 넘어가는 곳에 역시 두문동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들이 평생 은거했던 곳이다. 개성의 두문동과 구별하여 소두문동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망국의 한을 달래며 시를 짓고 노래를 불렀다. 이것이 훗날 정선아리랑의 기원이 되었다. 현재 정선 낙동리에는 7명의 현인이 살았다는 의미의 거칠현동이라는 별칭이 있다. 남면에서는 이곳을 정선아리랑의 발상지로 설정해 놓았다. 낙동리라는 본 이름보다 거칠현동(居七賢洞)으로 더 알려져 있다. 이것이 정선아리랑의 기원이다.

 

 정선아리랑의 또 하나의 특징은 정해진 노랫말이 없다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그때 그때 지어 부르면 그것이 가사가 되었다. 그래서 현재 등록돼 있는 가사만 해도 수천 가지가 된다는데 정확한 숫자조차 파악이 안 된다고 한다. 언젠가 나도 정선아리랑을 배워 보고 싶어서 아우라지 강변에 있는 전수관에서 한번 어울려 본 적이 있다. 그때 어느 영감 하나가 제 딴엔 잘난 척 하고 일본말로 가사를 붙여 노래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얼마나 역겹던지 그 후론 아예 발걸음을 끊었다. 참 짧은 아리랑과의 인연이다. 정선아리랑은 일제 때는 나라를 위한 충절의 가사를 붙여 망국의 아픔을 노래하며 민족의 애국심을 고취하기도 했던 노래였다. 그렇거늘 거기다 일본 말을 붙여 불러 제끼던 그 노인네의 황당한 꼬락서니라니. 나이를 먹어 노인이 된다고 다 어른으로 대접받는 건 아니다. 오히려 욕을 더 먹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얼빠진 영감탱이라고.

 

 그렇더라도 나는 이 정선아리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특별한 이유도 없다. 그저 가락이 내 취향에 맞지 않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민요는 신고산타령이나 노들강변이다.

 

 아무려나 이렇게 해서 생겨난 정선아리랑은 아우라지에서 조양강의 물길을 따라 세상으로 흘러 나갔고 지금도 그것은 흐르고 있어 어느 누군가의 입에선 끊임없이 불려지고 있다.

 

 

 

 

 

                                  정선아리랑 : 김병기 박경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