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음악 이야기

프로방스의 목가, 아를르의 여인

설리숲 2012. 3. 31. 00:11


 내 방앗간에서 내려와 마을로 가자면 길가에 서 있는 팽나무가 심어져 있는 널찍한 정원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한 농가의 앞을 지나게 된다. 그것은 어떻게 보아도 프로방스 지방의 소지주의 전형적인 집으로 붉은 기와를 이고 있으며, 갈색의 널따란 정면 벽에는 불규칙하게 창문이 열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훨씬 높이 올라간 곳에는 바람개비가, 그리고 짚더미를 싣는 활차(滑車)가 있었으며 갈색의 마른 여물 다발이 삐어져 나와 있었다.
  왜 이 집이 내 마음을 끄는 것일까? 어째서 그 닫혀진 출입문이 내 가슴을 쥐어 짜는 것일까? 그것은 입 밖에 낼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이 집은 나를 오싹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주위가 아주 조용하기 때문이다. 집 앞을 지나가도 개가 짖지 않고 색시닭은 우는 소리도 내지 않고서 치솟아 날곤 했다. 집안에서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만약 창마다 흰 커튼이 쳐져 있지 않고 지붕 위의 굴뚝으로부터 연기가 피어 오르지 않았다면 텅 빈 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제 정오의 종소리가 울렸을 무렵, 나는 마을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눈부신 햇살을 피하기 위해 팽나무 그늘 밑으로 해서 이 농가의 울타리 곁으로 바싹 다가서서 걷고 있었다. 집 앞의 길에서는 사내들이 묵묵히 짐마차에 여물단들을 싣는 일을 끝내고 있을 무렵이었다. 출입구는 열려져 있는 채였다. 그곳을 지나면서 흘낏 눈을 주었더니 뜰 안쪽에- 머리를 양손으로 고이고서- 돌로 만든 커다란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있는 머리가 새하얗게 센 키 큰 노인이 보였다. 짧디짧은 저고리에 낡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나는 발길을 멈췄다. 사나이들 중의 하나가 아주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쉿! 우리 주인 영감이라오 아드님의 불행이 있은 뒤부터 언제나 저 지경이 되어 있다오."
  그 때 상복(喪服)을 입은 한 여자와 작은 소년 하나가 책갈피를 금물로 입힌 두터운 성경책을 손에 들고 우리들이 서 있는 옆을 지나쳐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 사나이가 다시 이렇게 말했다.
  "미사에 참석했다가 돌아오시는 주인 마님과 둘째 아드님이라오. 맏아드님께서 자살한 후로는 매일같이 미사에 나가신다오. 그렇지요. 주인 어른께서 얼마나 가슴 아프시겠수. 우리 주인 어른께선 죽은 아드님의 옷을 걸치고 있으신 거라오. 사람들이 아무리 그 옷을 벗기려 해도 막무가내시라오. 헤이, 이랴 쩌 쩌!"
  마차는 덜커덩 흔들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듣고 싶었기 때문에 마차 위에 앉은 사나이에게 부탁하여 그 여물더미를 실은 마차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나는 그 마차 위의 여물더미 속에 묻혀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듣게 된 것이다.

 

  그 아들의 이름은 장이라고 했다. 스무 살이나 된 훌륭한 농부로서 소녀처럼 예쁜 남자였다. 건장한 몸과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또 굉장한 호남자여서 모든 여자들이 탐을 냈지만 그 사람 쪽에서는 어떤 한 여자만이 염두에 있었다. -빌로도와 레이스로 몸치장을 한 아를르의 젊은 여자로서 그는 오래 전부터 아를르의 리스 거리에서 만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집에서는 맨처음 이 두 사람의 관계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여자는 바람둥이라는 평판이 나 있었고 그녀의 양친도 이 고장의 토박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 여자를 맞아들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 여자를 맞아들이지 못하게 된다면 죽어버리는 게 낫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달리 어쩔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추수가 끝나면 두 사람을 결혼시키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일요일 저녁, 농가의 뜰에서 온 가족들이 저녁밥을 먹어치운 참이었다. 그것은 마치 결혼피로의 축하연과도 같았다. 약혼녀는 그 좌석에 참석지 않았지만 모두들 그 여자를 위해 진심으로 축배를 들었다. 바로 그때 한 사내가 문 앞에 나타나서 떨리는 소리로 에스떼브 영감님에게, 영감님 한 분에게만 드리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말했다. 에스떼브는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영감님."
  하고 사내가 말했다.
  "영감님은 순결치 않은 여자를 며느리로 삼으려고 하고 계십니다. 그 여자는 이태 동안 나의 정부였습니다. 내 얘기를 밑받침할 수 있는 증거가 있습니다. 바로 이 편지입니다. 여자의 부모들도 모두 다 승낙했습니다. 나에게 그년을 주겠다고 약속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영감님의 아들이 그년에게 청혼을 한 뒤로부터는 그년의 부모도 또 그년도 나를 거들떠보지 않게 된 거예요. 그렇지만 나는 그런 과거가 있는 계집이기 때문에 설마 다른 남자의 아내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해 왔어요."
  "좋아!"
  하고 에스떼브 영감은 편지에 눈길을 꽂았다.
  "안에 들어가 인사로 포도주나 한 잔 하시구려."
  사나이는 말했다.
  "싫습니다. 난 원통해서 술이고 뭐고간에 마실 생각조차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가버렸다.
  아버지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돌아와서 식탁을 마주하고 앉았다. 그래서 식사는 무난히 끝났다.
  그날 밤, 에스떼브 영감과 그 아들은 들로 나갔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밖에 있었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아직 자지 않고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보."
  하고 지주영감은 아들을 어머니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말했다.
  "애한테 키스나 해주구려! 딱하고 가엾은 놈이야."

  장은 이제 아를르의 여인에 대한 일은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조금도 변함없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가 다른 남자의 것이라는 것을 안 뒤부터는 전보다도 더욱 사랑하게끔 되었다. 자존심이 강했기 때문에 아무말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것이 그를 죽게끔 한 씨앗이 된 것이다. 가엾게도! 때로는 방구석에서 혼자 하루종일 꼼짝도 않고 앉아 있기도 했고, 또 때로는 정신없이 밭에 나가 일에 묻혀 있기도 했다. 그럴 때는 날품팔이들이 열 사람씩이나 붙어야만 할 수 있는 일도 혼자서 해치웠다. 저녁이 되면 아를르의 길거리로 나가 마을의 높고 긴 종루가 서쪽 하늘에 희미하게 보일 때까지 곧장 걷기도 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다시 돌아왔다. 결코 더 멀리 가는 법이 없었다.
  그가 이토록 늘 슬픔에 싸여 외톨이가 되어 지내는 것을 보고 가족들은 모두 다 어떻게 해주어야 좋을지를 몰랐다. 어떤 불길한 일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들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떤 때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어머니는 그가 눈에 눈물을 가득히 머금고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그래, 좋아, 장! 끝내 그 여자가 갖고 싶으면 맞아들여도 좋아."
  부친은 치욕을 느껴 새빨개진 얼굴로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장은 고개를 흔들고 밖으로 뛰쳐 나가고 말았다.
  그날부터 그는 부모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생활 태도를 바꾸고 언제나 명랑한 척했다. 무도회나 술집, 그리고 소떼에게 낙인을 찍은 후 으례 갖게 되는 마을의 잔치에도 그 모습을 나타내게끔 되었다.
 퐁비에이유의 축제에서 파랑돌 무용의 음두(音頭)를 잡는 것도 그였다.
 부친은 "저 녀석이 어젠 상처가 아문 모양야" 하고 말했지만 어머니로서는 변함없이 걱정스럽기만 해 전보다도 더 아들의 태도를 자세히 살폈다. 장은 양잠실(養蠶室) 바로 곁에 있는 방에서 동생과 함께 잤었는데 그의 노모는 두 아들이 자는 바로 옆방에 자기 침대를 옮겨 놓고 잤다. 밤중에 누에 시중으로 자기의 손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소지주들의 수호신인 성 엘르와의 축일이 눈앞에 닥쳐왔다.
  농가에서는 큰 즐거움에 싸이는 날이었다. 모두에게 샤또오뇌프 주(酒)가 돌아가게 되고 포도 시럽도 마냥 먹을 수 있게 나온다. 그리고 밀타작 마당에서는 폭죽이 터지고 모닥불이 기세좋게 타오르며 팽나무에는 하나 가득 색등(色燈)들이 밝혀진다. 성 엘르와 만세! 모두들 지쳐 쓰러질 때까지 파랑돌을 춤춘다. 동생은 새로 만든 작업복을 불에 태웠다. 장 자신도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에게도 춤을 추자고 나섰다. 기분이 좋아진 어머니는 기쁨의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한밤중이 되자 모두들 잠자리로 향했다. 어느 누구나 할 것 없이 졸음이 와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만은 잠이 들지 않았다. 동생이 후에 한 얘기로는 장은 밤에 일어나 앉아 울었다는 것이다. 아아! 정말 그는 무척이나 괴로웠던 모양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날이 샐 무렵. 어머니는 누군가 자기 침실 앞을 지나가는 발짝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무언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장이냐?"
  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층계를 오르고 있었다. 당황한 어머니는 재빨리 일어났다.
  "장, 어딜 가는 거냐?"
  그는 다락방에 있었다. 어머니가 뒤를 쫓았다.
  "왜 그래, 쓸데없이!"
  그는 문을 닫고 빗장을 질렀다.
  "장, 우리 장아, 대답을 해라. 왜 그러는 거니?"
  손을 떨면서, 늙은 손을 와들와들 떨면서 문고리를 찾았다. 창이 열리면서 뜰에 깐 포석 위로 무엇인가 털썩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가엾게도 젊은이는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그 여자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다. 차라리 죽어버리자.'
  아! 우리네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정(情)이라는 것! 아무리 상대를 경멸하려 해도 연정을 끊을 수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날 아침, 마을 사람들은 서로 만나 수군거렸다.

 엊저녁 에스떼브 영감님 집쪽에서 누가 그렇게 큰 소리로 울었었느냐고.
 그것은 뜰에서, 이슬과 피에 범벅이 된 포석 앞에서 가슴을 풀어헤친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양팔에 껴안고 뼈가 깎이는 슬픈 소리로 운 소리였다.

 

 

비제의 <아를르의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수만 자의 글보다는 이 단편소설 하나로 족하다.

 프랑스 한 시골마을의 서정과 풍광이 그림처럼 펼쳐지며 그곳에서 벌어진 사랑의 아름다움과 죽음의 비극이 애잔하고 유려하게 다가온다. 알퐁스 도데의 원작소설과 희곡, 그리고 그 희곡을 위해 작곡된 비제의 음악들이 조금도 어긋남 없이 어우러져 프로방스의 목가를 연주하고 있다.

 프랑스 작가와 프랑스 음악가의 프랑스 이야기 아를르의 여인.

 흐르는 곡은 제 2조곡 중에서 전원곡(Pistorale)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