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4대 장르는 시 소설 수필 희곡이라 한다. 그런데 나는 희곡에 대해선 물음표를 붙인다. 무대에서 연극을 올리기 위한 대본이지 그 자체를 문학이라 할 수 있을까. 셰익스피어 시대엔 어땠는지 모르지만 희곡을 따로 사서 읽는 독자가 얼마나 될까. 그것을 무대에 올릴 때 비로소 완성된 예술작품이 된다. 그것은 배우의 몫이고 업적이다.
아무리 훌륭한 음악을 작곡하여도 그것은 단지 오선지에 불과하다. 누군가 연주하지 않으면 종이쪽지다. 몇 백 년 동안 서랍에 보관하여도 음악이라 할 수는 없다.
같은 맥락일지 몰라도 창고에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아도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다. 써야 돈인 것이다.
19C에 멘델스존은 음악회에서 바흐 곡 연주에 덧붙인 '즉흥변주'를 통해 하마터면 잊힐 뻔 했던 바흐 음악을 부활시켰다. 당시 슈만은 멘델스존의 연주를 극찬하면서 두 음악가의 만남에 경탄을 보냈다
사실 아무리 바흐가 천상의 곡들을 작곡했다고 해도 사후 50년 동안 그는 사람들에게 일개 오르가니스트 이상은 아니었다. 멘델스존이 아니었다면 음악의 아버지라는 칭호도, 어쩌면 자취가 전혀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멘델스존으로 하여금 훌륭한 업적을 음악사에 남기게 한 건 바흐에 대한 사랑 내지 '일치'를 추구하고자하는 예술적 열정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 전해지는 바흐는 그 시대의 멘델스존을 통과한 대 바흐일수 있고 시간이 흐르면서 글렌 굴드 등 많은 대가들을 통과한 바흐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훌륭한 연주를 우리 같은 소시민은 선물처럼 여러 곳에서 전달받을 따름인데 그런 과정에서 '대작곡가'를 전달해주는 '연주가'에게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보낸다.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D단조 BWV.565...
‘가장 위대한 음악’이라는 이 곡도 멘델스존이 발굴하고 처음으로 연주하여 비로소 세상으로 나와 생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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