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농사

설리숲 2008. 7. 2. 21:55

 

 벼, 보리, 밀, 조, 수수, 옥수수, 메밀, 콩, 완두콩, 강낭콩, 팥, 녹두, 고구마, 감자, 상추, 호박, 오이, 시금치, 가지, 아욱, 고추, 무, 배추, 참깨, 들깨, 파, 마늘.


 해마다 저렇게 가짓수가 많게 작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느 해는 이것을, 어느 해는 저것을 했을 것이다. 내 유년시절의 기억은 3년이다. 그 세 해 동안에 내가 본 것을 다 들그서내면 이와 같다.

 우리 집뿐이 아니라 시골 농가라면 다 비슷비슷했다. 모든 것을 자급자족했다. 비록 되지기농사여서 늘 주리고 살긴 했지만 바다에서 나는 것만 빼면 저것들로만으로도 모든 것을 보충할 수 있었다. 현란하지 않은가.

 쌀과 보리로 주식을 했고, 밀로 가루를 만들어 먹었다. 참깨 들깨로 기름을 짰고, 고추 파 마늘이 있어 양념이 되었다. 콩으로 메주를 쑤어 장과 간장, 두부를 만들어 먹었고 콩나물을 키워 먹었다. 산에서 도토리를 주워다 묵을 쑤었고, 개울에서물고기를 잡아다 끓였다. 길금으로 엿을 고기도 했다. 그 달콤한 조청의 맛을 어디다 비길까. 겨울에 딱딱해진 옥시기를 들고나가 뻥튀기를 해오면 애나 어른이나 군것질로 제격이었다. 

 부족한 단백질이야 집집이 개가 있었으니까. 손님이 오거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라야 잡았지만 닭들도 아주 요긴한 먹을거리였다.

 그렇지만 가난했다.

 현란한 먹을거리가 있었어도 그들은 늘 굶주렸다.


 봄날에 집 앞 밭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감자를 심던 모습이 생생하진 않고 아스라이 실루엣처럼 따라다닌다 평생을. 아지랑이 뽀얗게 피어오르고 개울가 어느 둔치에서 휘파람새 하루종일 지절거리던 기억들. 어린 눈으로 본 그 밭은 참으로 넓었었다. 뽀얀 아지랑이 속에서 진종일 밭에 엎드려 감자를 심던 부모님.

 무지렁이 농사꾼의 일생은 고단하고 슬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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