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가 막힌 그 맛이라니. 어쩌다 한 점 먹어 보는 쥐 고기맛은 어느 육고기에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너나없이 모두들 가난했다. 그렇지만 가난한 줄을 모르고 살았다. 경애네도 승호네도 영숙이네도 다 그랬다. 비교대상이 없으니 부자와 가난뱅이의 개념조차 없었다. 굴왕신같은 초가집에 나서 보이느니 산이요 숲인 오지의 산과들을 보며 손바닥만 한 논배미 밭뙈기나 부쳐 먹고 애들 주렁주렁 낳아 역시 똑같은 집 자식과 혼인을 맺어 주고 그냥저냥 살다가 가는 걸 사람 일생으로 알았다.
먹는 건 늘 주렸다. 어디서 돈 나올 데가 없었다. 육징이 나면 산에 가서 토끼니 꿩을 붙들어 오고 개울에 나가 개구리를 잡거나 물고기를 잡아다 끓여 먹었다. 행사나 손님이 있으면 뒤란 돌 축대 밑에 몰려다니며 땅을 버르적거려 한창 벌레를 쪼고 있는 암탉을 한 놈 잡아 고았다. 돼지나 소는 언니 잔칫날 형 잔칫날 또는 누가 복을 부르며 저 세상으로 떠나면 먹었다. 그리고 한 해에 두어 번 마루 밑의 누렁이를 대추나무에 목매달아 먹고는 했다. 그 이외는 늘 푸성귀요 죽이었다. 그나마 푸성귀도 밥이 있어야 먹었다. 아무리 버르적대고 일을 해봐야 일 년 계량의 양식이 나오질 않아 춘궁기에는 허리를 졸라매고 죽으로 연명하며 삶을 부지했다. 봄은 그래서 공포의 계절이었다.
이러한 시대의 상황을 알아야 절대로 미개인이라 흉보지 못 할 게다. 오죽하면 생각만 해도 진저리치고 역겨운 쥐를 다 잡아 먹었을까. 그 때는 먹는 것 못 먹는 것의 구별이 없었다. 살아 움직이는 것은 모두가 육고깃감이었다. 잘 따져 보면 그렇지 않은가. 번데기도 먹고 벼 이삭의 메뚜기도 먹었다. 지금도 먹고들 있는 것들이다. 그럼 매미는 안 되고 굼벵이도 안 되고 방아깨비도 안 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꿩도 먹고 토끼도 먹고 돼지도 먹는데 개는 안 되고 하물며 청설모 뱀도 안 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쥐 역시 마찬가지다.
아버지는 가끔 쥐고기를 즐기셨다. 가난한 시골집에 쥐는 어찌 그리 쌨는지 정말 징글징글했다. 창애를 놓기도 하고 약을 놓기도 하고 했지만 워낙 숫자가 많은데다가 놈들은 번식력이 또 왕성해서 인력으론 중과부적이었다. 그러니 이뻐 하지는 않아도 쥐는 그냥 인간과 어울려 사는 일상의 반려동물 같은 것이었다. 지금이야 징그러운 대상이이지만 집집이 늘 보고 대하는 것이라 그 시절은 그냥 무덤덤한 쥐였다.
그깟 쥐 한 마리라야 먹을 것도 없는데 좀 여러 마리 잡으면 좋으련만 아버지는 꼭 한 마리만 잡아 당신 혼자 드셨다. 그놈의 노릿노릿 익는 냄새는 얼마나 사람 창자를 괴롭히던지. 그것도 고기라고 어린놈은 한 점 안 주나 아버지 턱 밑에 다가가 앉아 있지만 무정한 아버지는 낼름 다 먹어 치우곤 했다. 그런 아들놈 보기 민망해선지 가끔은 손톱만한 고깃점 하나를 떼어 주기도 했다. 그때 먹어 본 그 맛은 참말 기가 막혔다. 역시 쥐도 생명이고 남의 살이었다. 아마 어렵게 얻어먹는 그 희소성 때문에 더 맛있었는지도 모른다.
부잣집이나 가난한 집이나 쥐가 많기론 매일반이었다. 아 부잣집이야 쌀가마니 그득하니 먹을 게 많다지만 가난해서 공포의 보릿고개를 넘겨야 하는 집들에는 뭐 먹을 게 있다고 그리도 죽어라고 깃들어 살았는지.
보통 가을에 추수를 하면 방에다 쌀가마니를 들여 놓았다. 없는 집들이니 그럴듯한 광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몇 가마 안 되는지라 그냥 방에다 괴어 놓았는데 이대부터 쥐의 전성기다. 한번 길을 터놓고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들락거렸다. 그래서 ‘골방쥐처럼 들랑거린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의심이 많은 놈들이라 처음엔 밤에만 들어오던 놈들이 차차 대범해져 낮에도 들어와 쌀을 훔쳐 먹었다. 그러던 것이 아예 방안 에 사람이 있어도 겁을 내지 않고 제 방인 양 드나들었다. 낮잠을 자다 보면 쥐가 사람 몸을 타고 넘나들기도 했다. 가끔은 자는 사람의 발가락을 물어 비명을 지르며 공중제비로 일어나게 하기도 했다. 쥐에게 물린 상처는 파상풍으로 오래 고생했다. 쥐란 놈이 위생적으로 청결하지 않다는 건 일리가 잇는 것 같다.
다른 건 다 좋은데 반자에서 뛰어다니는 소리는 정말 싫다. 야행성이라 밤새 안자고 천장에서 그리 요란을 떨어대면 예민한 사람은 미치고 말겠다. 하지만 다행히도 사람들은 그것도 감각이 둔해져서 처음엔 고생해도 점차 안정이 돼 가는 것이다. 그건 또 괜찮다. 천장에서 오줌똥을 싸대니 도배 바른 종이가 여기저기 얼룩덜룩 가관이었다. 더구나 반자가 약한 어느 부분에는 똥의 무게에 금방이라도 쏟아질듯 천장이 불룩 쳐지기도 했다. 벽장에 숨겨 놓은 양미리를 뜯어 먹고 구덩이에 묻은 무까지도 갉아 먹었다. 서까래나 보를 갉아 대서 방바닥에 허옇게 떨어지는 지저깨비. 어쩐 연유로 죽어서는 물두멍에 둥둥 떠 있는 시체라든가, 밥을 푸고 있는 솥으로 뚝 떨어져 엄마를 놀래키기도 했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한 쥐의 추억이다.
그리도 지겹게 쥐와 같이 지냈으면서도 나는 늘 쥐가 징그러웠다. 그 꼬랑지만 봐도 몸이 스멀거리고 닭살이 돋았다.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쥐는 늘 써글써글하지만 지금 내가 사는 오두막엔 쥐가 없다. 이곳에 온 처음엔 겨울만 되면 찍찍거리며 밤낮으로 들락거리고 천정에서도 요란을 떨더니만 이젠 없다. 쥐가 먹을 만한 것은 아예 내놓지 않고 냉장고나 통 등에 넣어 두는 등 확실히 단속을 했더니 그담부턴 일체 얼씬하지 않는다. 가난한 집에도 득시글거리는 쥐들이 오지 않는 내 집. 난 얼마나 빈한한 사람인가.
언제 한번 오래 집을 비우면서 커피를 단속하지 못하고 다녀온 적이 있는데 와 보니 커피 봉지가 난장판이 돼 있다. 어허, 시대가 변하면서 이젠 쥐도 커피를 즐기는구나. 분탕질 치고 남은 커피가 꽤 되었지만 께름칙해서 못 먹고 다 버렸다. 길을 터 놓은 놈들이 계속 드나들지 않을까 했더니 이후로는 들어오지 않았다.
아침드라마 <복희 누나>에 쥐를 잡자는 옛날 캠페인 포스터가 배경으로 나왔다. 그날이 4월 11일로 설정돼 있어 한참을 재미있어 했다. 4월 11일은 총선일이다. 하필이면 4월 11일에 쥐를 잡자는 포스터라니. 연출자의 의도이든 우연이든 가슴 뜨끔한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하니 이런 것에도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쥐를 설치류로 분류했지. 쥐가 설치고 다니는 이런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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