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홍천 하고도 깊은 깡촌. 내가 있는 농장에 춘천 모 대학생 다섯이 들어왔다. 농촌체험 프로그램이라나 뭐라나. 남학생 셋에 여학생이 둘.
여학생 중 하나가 아주 심한 공주병환자였다.
마을에 들어오는 날 드레스 비스므리한 상아색 원피스에 이효리바지를 받쳐 입은 모양새가 참 가관이더니.
여러 재미 있는 에피소드가 있어 덕분에 즐겁기도 했고,
그중의 하나.
둘째날 되는 저녁에 시내 구경을 나가자고 조르는 통에 반강제로 끌려나갔다.시내라고 하지만 기껏 면소재지이므로 구경할 것도 없다. 얘네들이 나를 저들 노는데 끼워준 건 나를 운전기사로 채용하고 내 차를 이용하겠다는 심뽀이므로 하나도 고마울 것도 없다.
어느 카페에 들어가서 각자 주문들을 하는데,
-난 콜라
-나두 콜라
-난 체리주스
-난 아이스커피
한데 우리의 공주 점잖게,
-저는 선라이즈
애들은 킥킥대고 나는 어이가 없다.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거다. 저 재수덩어리.
-그건 안되는데요
웨이터의 표정에도 웃음기가 있다.
-그럼 버진키스는요?
-그것두 안되는데요
-그럼 호스넥은요?
-그것두....
그제서 웨이터가 측은해져서 내가 민망하다. 애들은 재밌어 죽겠단다.
-그럼 뭐가 돼요?
그제야 웨이터가 가져온 메뉴판을 들여다본다.
-애걔! 이게 다예요?
그러더니 마땅치 않은 표정으로
-핑크레이디 주세요
지집년두 참. 원 저렇게 유난을 떨 게 뭐람. 나쁜 년!
내가 공주에게 '년'이라 한 건 그날 결국 내가 돈을 썼기 때문이다. 핑크레이디는 훨씬 비쌌다. 거금 삼만 이천 원을 지불했다. 내가 연장자니 쓸 걸 쓴 셈이지만 유별나게 비싼 거 처먹은 그녀가 얄미워서다. 여우같은 년, 지가 무슨 공주라고.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진짜 이쁜 공주였다,
내 돈이 나가기 전에는....
2
카페에서 나와 이번엔 노래방.
난 사뭇 공주가 못마땅해 있는 상태다. 어디 노래방에선 무슨 노래를 하나 보자.
90년대 공주들은 강수지 노래를 불렀다는데 요즘은 모르겠다.
헌데 이런, 마이크를 든 우리 공주.
내 맘에 꼭 드는 사람을 만날 것 같아~
가슴이 쿵쾅쿵쾅 뛰는 걸 보니~
공주가 저런 노래를? 의외였다.
한데 그건 서막이었다.
어느 때 공주, 자리에서 일어나 엉거주춤 다리를 벌리고 자세를 잡더니만 헉, 냅다 개다리를 흔들어댔다.
흐미! 저기 뭐꼬!
애들이 뒤집어진다. 나도 뒤집어진다.
이후로 공주는 자리에 앉질 않았다. 무슨 노래가 나와도 이리 추고 저리 흐느적거리고, 스텝도 리듬도 영 맞지도 않게 흔들어대는데 이쁘게 차려 입은 드레스가 민망할 정도였다.
(첫날 한눈에 공주임을 알게 한 그 상아색드레스를 입고 난리부르스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효리바지는 없고 맨다리로)
그리고 템포 느린 노래, 브루스 타임이다.
이젠 앉겠지 했더니 웬걸.
공주, 눈빛이 내게로 향하더니 곧장 내 팔을 잡아 일으킨다.
햐, 시방 이기 무신 일이고?
간택. 그렇다 네 명의 남자 중에 내가, 바로 내가 공주님의 댄스 파트너로 간택된 것이다.
감읍, 황공무지.
나는 그만 정신이 혼미해졌고 아무 생각없이 그저 어정쩡하게 서서 할 일을 몰랐다. 공주님 내게 바싹 다가와 두 팔을 내 목덜미에 두르고는 몸을 흐느적거렸다.
나긋한 몸매, 향긋한 파운데이션, 아 공주님.
어떻게 끝났는지 모르게 나는 정신을 놓았었다.
자리에 돌아와서 한참을 진정한 끝에 나는 공주님에 대한 생각을 바꿨다.
그녀는 진짜 공주다. 내숭도 아니고 환자도 아닌.....
그간 농장에서의 여러 에피소드도 그렇고 카페에서 핑크레이디를 마신 것도(아니다, 드신 것도), 또 상아색 드레스도 다 그녀의 개성이었을 거다. 다시 되돌아보니 뭐가 달라도 다르다. 예쁜 여자는 그래서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냐. 그래 역시 여자는 무조건 예쁘고 볼 일이다.
공주님, 당신은 진정 아름다운 여인. 아까 "년"이라고 한 이 몸 죽여주시옵소서.
난 진심 팬을 넘어 충복이 되리라 작정했는데 한가지 섭섭한 건,
남자애들은 나더러 '형'이라 부르는데 그녀는 '아저씨'라 한다.
하긴 공주님이 평민더러 오빠라 할까. 감히 그런 생각을 품는 것 자체가 무엄한 일이다.
다음날 2박 3일의 일정을 마치고 공주님과 시종들은 소한동을 떠나갔다.
2004. 7.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