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기억 두 개를 담았다.
하나는 만화주인공 같은 소녀를 만나서 짧지만 풋풋한 만남을 가졌던 일이고, 또 하나는 세상을 뒤흔든 다섯 명의 야생 소년들을 만나게 된 일이었다.
당시는 국내 가요보다 팝이 주류였다. FM 라디오의 팝송 프로그램 비중이 훨씬 크고 많았다. 그 중에 라이벌 격인 프로그램이 있었다. 똑같이 오후 2시에 방송되었으니까 경쟁할 수밖에 없었다. <김기덕의 두시의 데이트>와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이 그것이다.
김기덕의 프로는 가볍고 장난스러워 어쩐지 유치한 분위기였다. 나는 말만 많은 그것보다는 음악이 주가 되는 김광한의 프로를 들었다. 깔끔한 진행과 무엇보다도 팝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상식을 거미줄처럼 뽑아내는 그의 박학다식이 좋았다.
김광한은 애청자에 대한 서비스의 일환으로 전국을 돌며 뮤직비디오쇼를 벌였다. 가히 비디오시대의 절정기였다. 팝가수들은 너도나도 뮤직비디오를 제작해 듣는 노래가 아닌 보는 노래로 문화 콘텐츠를 변환했다. 그때까지 한국가수들은 뮤직비디오의 시작은 고사하고 그걸 신기하고 부러워하던 시기였다.
비디오의 시류를 타고 그 이점을 가장 잘 이용해 성공한 아티스트는 아마 듀란듀란(Duran Duran)일 것이다. 음악적인 것보다는 빼어난 외모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그들은 비디오시대에 걸맞은, 시쳇말로 때를 잘 만난 걸출한 스타였다. 그 화려한 외모가 그들의 음악성을 상대적으로 평가절하하게 만든 독이 됐다는 세간의 평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음악은 절대 과소평가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다. ‘뉴웨이브’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시한 ‘선구자’라고 감히 평하고 싶다. 노래의 멜로디보다는 편곡과 사운드에 관심을 두어 처음보다는 점차 들을수록 빠져드는 매력이 있다. 유효적절하게 신비로운 신시사이저를 넣어 그들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구축했다.
어쨌거나 그들은 당대 최고의 스타였다. 그날 김광환이 춘천을 찾아 예의 그 뮤직비디오쇼를 공연했다. 밥보다 팝이 좋았던 내가 그곳에 가는 건 당연했다. 거기서 만화주인공 같은 소녀를 만났고. 그 얘긴 의미가 없으니 그렇고. 거기서 듀란듀란의 비디오를 보게 되었다. 이미 그들의 노래는 널리 알려져 있어 국내외 소녀들의 우상이 되어 있던 터였다. 관객의 대부분이었던 그녀들의 엄청난 함성으로 사실 음악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가수의 공연이 아니고 기껏 뮤직비디오에 그렇게도 열광하고 환장하는 광경이 몹시도 신기하고 경이로웠다.
어느 그룹이나 마찬가지지만 멤버는 여럿이어도 리드 보컬이 가장 많이 조명을 받고 화면에도 가장 많이 보여지는 게 보통이다. 듀란듀란도 역시 주 얼굴은 사이먼 르봉이었고 팀의 대표 이미지였다. 그런데 베이스를 치는 존 테일러 또한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다. 모든 멤버가 다 꽃미남이지만 존 테일러가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이따금 스치듯이 화면에 존의 얼굴이 보일 때마다 소녀들은 까무라칠듯이 괴성을 질러댔다. 가수 공연장에서 실신하여 실려 나간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 수도 있겠구나. 난생 처음 겪어 보는 기묘한 체험이었다.
듀란듀란은 80년대를 가장 화려하게 장식한 그룹이다. 아직도 ‘Wild Boys’에서 거침없이 내지르는 창법과 강력한 전자음이 귀에 쟁쟁하다. 나는 그들을 야생의 소년들이라고 혼자 명명한다.
후에 와해 분위기가 있어 존 테일러와 앤디 테일러가 팀을 떠나 ‘파워스테이션’을 결성했고 남은 세 멤버 사이먼 르봉, 닉 로즈, 로저 테일러는 다시 '아카디오'를 조직해 각자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오랜 세월 뒤 다섯 멤버가 재결합을 했다. 2002년이었다. 다시 뭉친 건 알았지만 그후 그들의 노래가 어땠는지는 나는 모른다. 그들의 노래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이미 한국의 대중음악은 팝에서 국내가요로 무게중심이 옮겨져 있었다. 이미 나이도 중년이 훨씬 넘어버려 과거 명성의 핵심이었던 외모의 메리트는 전혀 없었다. 어쨌든 그들은 다시 듀란듀란이 되었다. 2006년에 앤디 테일러가 또다시 팀을 떠나 지금은 4인조 듀란듀란이다.
그들이 3월에 내한 공연을 갖는다고 한다. 이젠 다들 50대가 되었다. ‘Wild Boys’를 내지르던 그 야성들은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재결합해 환갑을 앞둔 나이에 공연하는 것을 상상해 보면 아무래도 젊은 날의 듀란듀란을 느끼기엔 많이 허전하겠다.
2008년에도 내한해 공연했던 바 또다시 온다는 건 그래도 아직은 그들이 팔리고 있다는 게 아닐까.
듀란듀란은 1978년에 결성됐다. 한국에서의 성공은 세번째 음반에
실린 The Reflex가 크게 히트하면서다.
여담,
일본이 팝의 거대 시장인 만큼 웬만한 아티스트는 거의가 일본을 다녀간다. 이따금 한국에 와서 공연하는 아티스트도 대개 일본공연을 목적으로 와서 온 김에 한국에 들르는 경우다. 내심 얄밉고 속상하지만 경제논리에 어쩔 수 있겠는가.
그건 괜찮은데 진짜 얄미운 건 한창 잘 나갈 땐 한국 따위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나이 먹고 인기도 떨어지고 잊혀져 가면서 어디서 불러주지 않는 퇴물(?)이 돼서야 그제서 한국이라는 나라를 찾아오는 행태다. 이미 젊은 날의 목소리를 잃은 노래로 돈을 걷어 가려는 심보가 곱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80~90년대 전성기 때 7번이나 내한공연을 했던 호주의 ‘에어 서플라이(Air Supply)’는 괜시리 정감이 간다. 그들의 음악성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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