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음악 이야기

채동선이 잃어 버린... 고향

설리숲 2012. 1. 10. 14:25

 

 

 홍교를 건너면 어울리지 않게 큰 건물이 우람하게 서 있다. 옛 일제시대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벌교읍에서 이 건물은 지나치게 딱딱하고 위압적이어서 어찌 보면 주위 환경을 해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채동선음악당이다. 벌교천을 건너지 않아도 읍의 어디서나 음악당이 보인다.

 설 연휴여서 음악당은 휴관이었다. 대신 조정래 태백산맥문학관에서 여정의 아쉬움을 채웠다

 가장 한국적이고 가장 민족적인 음악과 예술을 지향했던 음악가 채동선이었다. 일제하에서도 민족의 긍지와 혼을 잃지 않은 영원한 조선인이었다.

 그가 해외유학에서 돌아왔을 때 조국은 너무나 황폐하고 초토화되어 있었다. 오랜 식민지의 결과로 실개천이 흐르고 종달새가 날던 옛 고향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부기 가득한 얼굴로 피폐해 있었고 뒷산 노송들은 일제가 항공유를 뽑아 쓰기 위해 죄다 잘려져 있었다. 암울하고 절망적인 조국과 고향의 현실이었다. 특히나 지리적인 조건으로 일인이 부산하게 오가던 고향 벌교는 그 폐해가 자심했다.

 예술은 절망적일 때 더 빛이 난다고 한다. 음악가의 가슴에는 분노와 절망과 함께 뜨거운 욕망이 일었다. 그때 정지용의 시를 만났다. 그의 시에는 채동선 공유했던 옛 고향의 정한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것이 불세출의 명곡 ‘고향’이다.

 

 

 그러나 우리 문학사의 가장 뛰어난 서정시인 정지용은 동란과 함께 월북하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 정부는 즉시 숙청을 단행한다. 정지용의 시나 글은 금서가 되었으며 모든 기록에서 그의 흔적을 제거했다. 일제에게 손바닥 비벼 가며 안위를 추구하고 민족을 팔아 영달을 누리던 매국 친일 인사들의 글은 버젓이 교과서에 실렸지만 조국과 민족을 걱정하고 사랑했던 민족주의 인사들의 글은 박해를 받는 아이러니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 역사는 끊어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아 여전히 그들의 위세는 천하를 호령할 만큼 기세등등한 상태다.

전쟁 말미에 채동선도 사망한다. 가곡 고향엔 정지용의 시 대신에 박화목의 망향이 가사로 붙여졌다. 그리고 그후 이 비운의 가곡에는 다시 이은상의 그리워가 노랫말로 붙여졌다. 결국 작곡가 본인은 그 일련의 불행한 사건들을 알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사람들만이 북치고 장구를 쳐댄 형세다.

 

 이데올로기가 대체 무엇이기에 망자의 영혼까지도 핍박해 가면서 난리를 쳐야 하는지.

 

 

 나는 학교에서 ‘그리워’를 배웠다. 이 아름답고 서정적인 곡과 가사에 이런 비운의 아픔이 얽혀 있을 줄은 몰랐다. 그리워의 노랫말도 좋지만 작곡가에게 음악적인 영감을 준 정지용의 고향이 원래대로 돌아와야 할 것 같다. 생각하면 이 큰 세상은 가녀란 길섶의 풀 한 포기의 흔들림에도 엄청난 사회적 변혁을 겪곤 한다. 그만큼 인간은 나약하고 가벼운 족속임을 보곤 한다.

 

       

                                     정지용 시 / 채동선 곡 / 조수미 노래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 조수미

       한가지 옥의 티를 말하면 우리말 노래를 할 때 발음이 부정확하다는 것.

       외국 노래는 내가 그 말을 모르니 알 수 없지만

       마치 외국인이 서투르게 우리말을 하는 것 같이 가사의 내용이 명확하게 들리지 않는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