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누에 뽕 그리고 오디

설리숲 2008. 5. 12. 20:45

 그렇잖아도 코딱지 만한 시골집 방에 누에가 들어오면 당분간은 우리들은 잠자리가 편하지 못했다.

 날이 풀려 봄기운이 무르익으면 누에를 키웠다.

 어떤 생명이든지 어린 놈들은 다 귀엽다. 알에서 부화한 녀석들은 너무 작아서 벌레 같지도 않고 잘 뵈지도 않았다. 눈을 바짝 들이대고 가만히 들여다 봐야 꼬물대는 게 겨우 보일 정도다. 크기가 좁쌀만 했다.

 그러던 녀석들이 성충이 되면 어른 새끼손가락만하게 커서 그 얼마나 징그러운지.

 

 안방에다 층층이 잠가를 올렸다. 처음엔 잠가 하나에 모여 오글거리더니 그 다음엔 잠가 둘에, 나중에 큰 성충이 되면 잠가를 모두 차지하고 우글거렸다.

 어린 누에는 연한 뽕잎을 주었다. 그것도 모래처럼 잘게 썰어 뿌려 주었다. 커가면서 점점 굵게 썰어주고 나중엔 크고 억센 잎을 그냥 주었다. 먹는 양도 엄청나서 누나들은 매일 두 세 자루씩 뽕잎을 따와야 했다. 바야흐로 온집안은 누에와 뽕 일색이었다.

 그 엄청난 수의 누에들이 뽕을 먹는 소리는 가히 하늘의 소리라 해도 좋았다. 비가 내리는 소리를 아련히 잠결에 듣는 것 같기도 했고, 들어본 적 없는 저 먼 나라의 파도소리 같기도 했다.

 안방을 누에에게 빼앗긴 가족들이 웃방이나 사랑방에 뭉쳐 자길 여러 날, 가끔 엄마는 나를 누에 방에 재웠다. 양쪽 벽으로 층층이 잠가가 올라가 있고 가운데 꼬맹이가 누울 자리는 충분히 되었다. 자다가 문득 깨보면 그 징그런 벌레가 얼굴로 스멀스멀기어오르는 때가 더러 있어 자지러지게 놀라 다시는 거기서 안 잔다고 버텨 보지만 잠이 들면 엄마는 나를 그 방에 버리고 가곤 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잠가 밑 방바닥엔 녀석들이 싸댄 똥들이 깔려 있곤 했다.

 

 누에는 석 잠 또는 넉 잠을 잤다. 하루나 이틀을 먹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그대로 잠만 자는 것이다. 어린 마음에 그게 얼마나 신기하던지.

 성충이 되어 이제 녀석들과 헤어질 때가 가까워진다. 산에서 생솔가지를 베어다 누에 방에다 잔뜩 세워 준다. 마치 숲을 그대로 방에 옮겨온 것 같이 방은 송림(松林)이 되어 버렸다. 누에는 자기의 습성을 잘 알아 어느날 하나 하나 소나무에 기어올라가서는 꽁지에서 세사를 뽑아 능숙한 솜씨로 집을 짓는 것이다. 이때는 누에들이 성가시지 않도록 그 방에 들어가거나 열어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세상이 바뀐듯 방안의 소나무마다 목화송이처럼 하얀 고치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것 또한 신기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렇게 징그럽게만 보이던 미물들도 종내에는 그토록 아름다운 세상을 꾸미고 마는 것이다.

 초여름이 시작되기 전에 이렇게 누에와 뽕의 계절도 다 간다.

 

 그리고 뽕나무엔 오디가 열려 처음엔 파랗게 그 다음엔 뻘겋게 익다가 드디어 새까맣게 익으면 손만 대도 달콤한 물이 주루룩 흘러 손가락을 물들이는 맛있는 오디가 된다. 군것질거리 귀하던 시절에 신나는 건 아이들이다. 노상 뽕나무에 매달려 그것들을 따 먹고 놀았다. 그간 아이들은 누런 똥이 아니고 까만 똥들을 누었다. 손과 입가에는 너나없이 까만 얼룩들을 묻히고 다녔다.

 

 누에를 쳐서 그게 수지가 맞았는지 어땠는지는 꼬맹이라 잘 모르지만 아무튼 봄철만 되면 식구들을 내쫓고 안방을 차지하는 녀석들을 별로 달가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또다시 오디가 익어 가는 계절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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