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도 저물어 묽은 서리도 내렸다.
갈참나무 마른 잎이 찬바람에 버스럭거리는 추운 계절이면 우리 안방에선 옥시기를 땄다. 저녁을 일찌감치 물리고 보꾹과 장광에 매달아 두었던 옥시기를 내려 방에다 산더미 같이 쌓아 놓았다.
강원도 돌비탈밭이야 뭐가 있겠나. 그저 감자 아니면 콩. 옥시기지.
지금은 짐승들 사료로나 쓰이는 옥시시가 그 시절 산골에선 가을 겨울 봄철을 지나면서 먹을 아주 요긴한 식량이었다. 쌀과 섞어 혼식을 하기도 했고, 푹 삶아 먹기도 했다. 맛이 없으니 사카린이나 당원 따위를 넣어 먹었다. 때로는 옥시기죽을 끓여먹었다. 맷돌에 타서 설겅설겅해진 옥시기를 넣어 지은 밥은 익어도 역시 설겅설겅해서 씹고 넘기는 맛이 까끄러웠다. 쌀 등 식량이 부족하니 그래도 넘겨야 했다. 이밥은 누구 생일날에나 먹었지 그렇지 않으면 사시사철 늘 잡곡밥이었다. 콩, 보리, 밀, 수수, 조밥, 옥시기밥.
사람뿐 아니라 겨울 닭모이로도 쓰였다. 곡물이 부족한 겨울철엔 닭도 한 마리만 키남겨 놓았다. 그래도 가을의 그 많던 옥시기는 어느 결에 없어지는지 채 봄이 오기도 전에 축이 나곤 했다.
이미 겨울은 바투 와 있어 문밖에는 싸늘한 밤바람이 빈밭을 지나 굴목 뒤 울타리 안을 휘감고 돌았다. 흙벽에 서리서리 매단 시래기가 펄럭이는 저녁이었다.
등잔불 하나 밝힌 침침한 방에선 옥시기 알 따는 소리만 들렸다. 손으로 따면 수월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손가락이 부르트거나 물집이 잡히기 일쑤다. 방추로 따면 손은 안 아프지만 숙련된 사람이 아니면 속도가 느렸고 어설프면 송곳에 찔려 피를 보기도 했다.
밤이 이슥하면서 옥시기 빈 대궁은 늘어 갔고 방바닥엔 처마 밑에서 딱딱하게 마른 옥시기 알이 두텁게 깔렸다. 뒷밭 저쪽 숲 어디선가 승냥이 요사스럽게 캥캥거리고, 찬바람은 더욱 기승을 부려 기스락 억새들을 뉘였다.
퉁퉁 부르튼 손을 하고 기어이 일을 끝내면 빈 대궁은 부엌으로 갔다. 아궁이에 넣을 땔감이었다. 아버지는 방바닥에 깔린 알곡을 가마니에 쓸어담았다. 산더미처럼 많던 옥시기가 채 가마니 하나를 채우지 못했다.
그제서 식구들은 방을 쓸고 잘 준비를 했다. 방문을 멸면 마루에도 들어와 있던 싸늘한 바람이 방안으로 슬쩍 몰려들어왔다. 진저리치게 차가운 마루바닥을 딛고 서서 내다보는 하늘엔 눈썹달이 처연하게 걸려 있었다. 아 으씰으씰 추운 밤.
곧 겨울이겠거니 사람들은 몸으로 계절을 감지하곤 했다.
부엉이가 길게 목청을 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