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총이 없어 같이 놀 동무도 없었다. 또래 사내아이로는 승호라는 아이가 있었지만 골안에 사는 아이라 우리 집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이따금 근처 개울에 놀러오는 걸 몇 번 보는 정도였고, 동무가 될 형편이 안된 건 그 애는 약간 지능이 떨어지는 아이였다.
가까운 데 아이들은 경애와 영숙이었는데 그나마 그 애들과 제법 어울려 놀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신통치 않았던 게 둘 다 나보다 한 살 적었다. 게다가 다 계집애들이었다. 아마 혼자 놀길 좋아했던 것도 그게 이유 중의 하나일 수도 있겠다.
어느 날. 그게 봄이었던가? 철은 정확히 모르지만 길섶에 제법 파랗게 풀이 나 있었으니까. 그날도 영숙이네 집엘 갔다. 내 누이들과 그 집 언니들이 또래또래 절친한 동무들이라 나도 뻔질나게 그 집엘 다녔다.
어찌어찌 영문은 모르겠으나 다들 없는 집에 영숙이의 바로 위 언니인 민자랑 둘이 놀게 되었다. 민자는 나보다 나이가 많아 학교엘 다니고 있었지만 나는 한번도 언니나 누나 소리를 안하고 민자라고 이름을 불렀다.
민자도 꽤나 심심했었나 보다. 나보고 맴을 돌자고 했다. 나는 싫다고 했다. 맴을 돌면 어지러운걸. 그래도 자꾸만 꼬드겼다. 바깥마당으로 데리고 나와서는 자기가 먼저 빙빙 돌면서 참 재밌다, 여봐 얼마나 재밌는데, 여차하면 집으로 돌아갈 것 같은 나를 잡아두려고 살살 꾀었다.
어린 마음에도 쓸데없이 뻥치는 건 줄 알면서도 왠지 따라 하고픈 마음도 슬그머니 생기는 것이었다. 그렇게 꾐에 빠져 같이 맴을 돌며 놀았다. 맴돌기에 재미가 붙어 이젠 내가 더 신나게 돌았다. 돌고 돌고 또 돌고.
첨엔 어지러워 고통스러웠지만 그럴 땐 반대로 돌기도 하고 또 잠깐 서서 가라앉히기도 하면서 사뭇 돌았다.
그리고 결국 탈이 나고야 말았다. 어느 때부터 속이 울렁거렸다. 개의치 않고 두 사람의 맴돌기는 계속 됐다. 속이 메스꺼워졌다. 더 이상은 놀 수 없게 고통스러웠다. 그런데도 민자는 자꾸만 하자고 부추겼다. 마당가 돌각담에 앉아 속을 가라앉혀 보았지만 온몸에 땀은 흘러내리고 속이 뒤집어지는 듯 참으로 괴로웠다. 혼자서 재밌다고 맴을 돌고 있는 민자를 두고 비척비척 집으로 걸음을 떼어 놓는데 그예 거위침이 올라왔다. 길섶 풀숲에다 허연 거위침을 게워냈다. 여전히 하늘은 빙빙 돌고 세상이 노랬다. 무서웠다. 뱃속의 밸창지까지 죄다 쏟아낼 것 같아 겁이 났다.
어찌어찌 집근처까지 오면서 죽어라고 민자를 욕했다. 이상한 건 같이 맴을 돌았건만 왜 민자는 멀쩡할까. 그때 소견으론 아마 내가 아직 어린 애기라서 그럴 거라고 스스로 진단했던 거 같다.
집에 다다르자 울타리 너머로 엄마가 보였다. 안도감. 거기서 또다시 우웩, 하고 속의것을 게웠다. 그랬는데도 엄마는 별로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내 창백한 얼굴을 보았을 텐데도 그저 심상한 얼굴이었다. 걱정하는 대신 얼른 부엌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종지에다 노란 참기름을 내왔다. 엄마는 내가 체한 걸로 알았던 모양으로 당시 민간요법으로 체한 데에는 참기름을 끓여 뜨거운 채로 먹였던 것이다.
나는 분명 잘못된 처방인 줄 알면서도 엄마가 숟가락으로 떠 먹여주는 참기름을 다 받아먹었다. 그렇잖아도 속이 메스껍고 휘둘리는 차에 느끼한 참기름은 얼마나 고역이었는지. 종지를 다 비우고 또다시 속의것을 게워냈다. 엄마는 무심하게도 인제 다 낫느라고 그래.
나는 맴을 돌아서 그렇다는 말을 안했다. 우선 몸이 괴로워 말마디를 꺼낼 수조차 없었다. 또 나를 꼬드겨 그 지경으로 만든 민자가 몹시도 밉고 괘씸했다. 사내놈이 여자 꾐에 빠져 그랬노라는 말을 하기가 싫었다. 그 어린 나이에. 다섯 살이던가 여섯 살이던가 아님 일곱 살이던가 아무튼 젖 뗀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꼬마녀석이 그런 자존심이 있었다.
두어 번을 더 게우고는 나라져서 방바닥에 쓰러졌다. 천정이 또 빙빙 돌았다. 내처 잠이 들었다가 밤새 끙끙 앓고는 이튿날 아침에 말짱하게 일어났다. 민자에 대한 적개심은 이미 다 사라지고 오늘은 무얼 하고 놀까를 궁리했다.
철없던
그러나 순진했던 나의 유년시절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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