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설리숲 2008. 1. 28. 20:36

 

 눈이 내리면 산골은 고요하다.

 눈이 내리지 않아도 산골은 늘 고요하지만 하얗게 눈이 내려 덮이면 길짐승도 날짐승도 그 자취가 보이지 않는다. 이따금 눈을 쓸고 지나가는 바람소리뿐.


 요즘은 발목 정도만 와도 대설경보니 뭐니 해서 호들갑스럽지만 내 어린 시절엔 참 눈이 많이 왔다. 처마까지 쌓이는 건 다반사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방안이 어두컴컴했다. 이른 시간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러면 틀림없이 눈이 푸지게 내린 것이다. 쌓인 눈 때문에 문이 열리지 않을 때도 있다.

 아이들이야 그런 광경을 좀처럼 보진 못했다. 일어나 보면 어른들이 이미 마당과 길을 치워 놓았다. 꼬맹이는 저도 눈치우고 싶은데 다 해 버렸다고 칭얼대기도 했다.

 눈을 치우지 않으면 조반을 먹을 수가 없다. 물을 길어야 동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물 긷는 길은 만들어야 했다.

 조반을 먹고 어른들이 낸 길을 따라 가본다. 양옆으로 쌓인 눈더미 속에 묻혀 누리가 보이지 않았다. 좁은 하늘만 보였다. 이런 날은 이웃 간에 왕래가 없었다. 먼발치 굴뚝에 연기가 나는 걸 보고 서로 안부를 확인한다.

 

 눈 오는 날은 세상이 고요하고 아늑했다.

 두발가지 짐승도 네발가지 짐승도 어디에 숨었는지 자취가 없다. 그러나 곧 짐승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 덮인 산야에서 먹이를 찾지 못하는 녀석들이 인가 근처로 오기도 한다. 운이 나쁘면 그걸로 녀석의 생은 끝나 버린다. 기껏 배고파서 찾아온 놈인데 사람은 그걸 잡아먹는다. 워낙 먹는 게 주리던 가난한 시절이었다.

 사람 키를 넘는 눈이면 몰라도 웬만한 눈이 내리면 사람들은 토끼를 잡으러 다녔다. 그런 날은 너도나도 오랜만에 맛난 고기를 포식한다. 세상에서 제일 맛난 고기가 토끼라고 어른들은 그랬지만 꼬맹이는 토끼든 꿩이든 기름진 고기는 뭐든지 맛있기만 하고 다 그게 그거였다.

 

 가을에 첫눈이 내리면서부터 산골은 아주 긴 겨울에 들어간다. 개울가에 버들개지가 피고도 한 달포나 더 지나야 돋을양지에 눈이 녹기 시작한다. 참으로 길고 깊은 겨울이었다.

 사람들의 겨울은 한편 척박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가장 여유로운 나날이었다. 일을 하지 않으니 적당한 곳에 창애나 올가미를 놓거나, 새끼를 꼬거나, 기직 가마니를 짜거나, 그래도 시간이 남아 사랑방에 보여 육백이나 뻥을 쳐 막걸리를 받아다 먹고, 그게 성이 안차면 섰다판을 벌이기도 했다. 노름에 빠져 패가망신한 사람도 있었다.


 눈이 내리면 산골마을은 그저 깊은 꿈속 같은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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