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깻망아지

설리숲 2008. 2. 2. 23:29

 

 둘째누이와 막내 누이가 그중 잘 어울려 놀았다. 가끔은 나도 끼워주곤 했다. 하긴 아직 코흘리개인 막내 동생을 돌보아야 하는 의무감도 있긴 했다. 아부지 엄마는 늘 논밭에 나가야 했고 큰 누이가 집안일을 했다. 첫딸은 살림밑천이라더니 과연 큰 누이는 집의 든든한 대들보였다. 나 다섯 살 때 시집온 큰 형수는 열일곱 살이었다. 애기 같은 올케를 데리고 이것저것 가르쳐 가면서 잡다한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둘째와 막내 누이는 집안을 건사할 나이가 안됐으므로 좀 자유로운 편이었다. 둘이서 산에도 가고 들에도 나가고 계곡물에서 돌을 들춰 가재도 잡았다. 가을에는 논에 나가 메뚜기를 잡아다 온 가족이 볶아 먹곤 했다.

 자유로운 두 누이였지만 무작정 놀기만 한 건 아니었다. 해토머리엔 묵정밭에서 냉이와 달래를 캤고 추수할 땐 부모님을 도와 하루 진종일 일도 했다. 돼지감자나 옥수수 등 그날그날 끼닛거리들을 캐거나 따오는 일도 했다. 들판에 나가 소 먹일 꼴을 베어 왔다. 개울에 나가 개구리도 잡아 왔다.


 두 누이는 함박골을 자주 갔다. 거기 산속 비탈밭에 우리 고구마가 있었다. 고구마 순을 잘라 와야 저녁 반찬을 했다. 캔 고구마는 두 누이가 조금씩 나눠 들었고, 칡덩굴로 걸빵을 만들어 고구마순을 내게 지웠다. 꼬맹이가 덜렁덜렁 고구마순을 메고 걸어가는 게 젤 기억에 남는다고 막내누이가 어른이 돼서도 자꾸 그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때의 내가 제일 귀여웠다고 한다.

 꼭 고구마밭이 아니더라도 함박골은 두 누이의 산책코스였고 놀이터이기도 했다. 여름이 끝나고 선들바람이 불어오면 산골은 각종 열매가 익기 시작한다. 함박골에 가면 시적지근한 돌배도 땄고, 새빨간 애광도 땄다. 보기만 해도 침이 넘어가는 팥배도 있었고 달콤한 다래, 새까만 머루 들이 지천이었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익어가는 개복숭아도 맛이 일품이었다.


 그 어름의 일이었다. 역시 함박골엘 다녀오는 길. 그때나 지금이나 만물이 흥성한 여름철엔 온갖 벌레들도 풍성했다. 나는 졸랑거리며 앞장서서 걷고 있었는데 뒤에서 자지러지는 비명이 들렸다. 막내 누이였다. 무슨 벌레가 옷에 붙은 모양이었다. 눈이 사색이 되어 까무러치듯이 새된 비명소리였다.

 둘째 누이가 가까운 나뭇가지를 꺾어 벌레를 털어냈다. 과연 언니다운 침착한 행동이었다.

 땅바닥에 떨어져 꿈틀거리는 벌레는 깻망아지였다. 깻망아지는 참깨에 서식하는 놈으로 크기가 여느 벌레들보다 엄청 크다. 아마 우리가 보는 것 중에 제일 클 것이다. 또 세상에서 제일 징그러운 벌레가 바로 그 깻망아지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딱정벌레류나 날개곤충들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지렁이를 비롯한 꿈틀거리는 벌레는 딱 질색이다. 어른이 되면 무덤덤해질 만도 한데 난 아직도 그런 벌레들만 보면 인상이 비틀어진다. 누이 역시 젤 징그러운 게 깻망아지였다. 그런데 그놈이 바로 팔뚝에 척 달라붙어 있었으니 얼마나 놀랬을지 짐작이 간다.

 깻망아지는 참깨에 붙어살면서 보호색을 만들어 여름엔 초록색이고 가을엔 갈색으로 변한다. 가을에 참깨를 베어다 타작하다보면 시커먼 놈들이 툭툭 떨어져 나오는 것이다. 타작매에 맞아 어떤 놈은 툭 터지기도 하는데 터진 벌레는 또 얼마나 징그러운가. 게다가 크기가 어른 엄지손가락보다도 굵은 놈이니 으으으....


 막내 누이의 팔뚝에 붙었던 놈도 터졌다. 나뭇가지로 떨어내려는 걸 이놈이 안 떨어지려고 버티다가 결국은 터진 채로 길바닥에 떨어져 꿈틀댔다. 터진 액이 누이의 팔에도 남았다. 누이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너무 놀라 울지도 못했다. 며칠을 앓았다.


 그 사소한 사건이 평생의 업으로 남았다. 그후로 막내누이는 병적으로 벌레를 무서워한다. 근래에 봄철이면 세 자매가 모여 어머니 산소에도 가고 간 김에 봄나물도 뜯는다. 그러나 막내 누이는 절대 숲에 들어가지 않는다. 입구에서 혼자 앉아 기다리다 오는 것이다. 벌레가 무서워서이다.

 나도 여전히 꿈틀거리는 벌레는 질색이다. 그래도 숲에 살다보니 웬만한 것엔 익숙해져서 어릴 적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그렇지만 그놈 깻망아지를 본다면 역시 우웩 꽁무니를 뺄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징그러운 벌레 깻망아지.

 그런데 시골에 살아도 주위에 참깨를 하는 농가가 거의 없다 보니 그놈을 볼 기회가 없다. 하기사 참깨 농사를 해도 요새야 약들을 치니까 벌레들이 붙어 살 수도 없겠다.

 

 

                    

 

                   

 

                     

 

 

'서늘한 숲 > 유년의 대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방에 무슨 일이 있었나  (0) 2008.02.08
동경  (0) 2008.02.03
적과의 동침 - 이(蝨)  (0) 2008.01.31
  (0) 2008.01.28
무서운 광경  (0) 2008.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