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선수

설리숲 2005. 5. 24. 19:40

 

 아침 느지막이 구천동 게곡을 오른다.  백련사에 도착하여 법당에 삼배합장하고 하도 볕이 좋아 층계에 앉아 한참을 해바라기하다 하산하는데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등산복 차림의 여자 하나. 그때부터 자꾸만 신경이 뒤꼭지에만 간다. 멀어지지도 않고 가까워지지도 않는, 꼭 그 거리인 채 내 뒤를 따라온다.

 이런 경우가 나는 아주 지랄 같다. 휭하니 앞서가면 좋으련만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낯선 이와 동행(동행도 아니지만)해서 간다는 건 아주 고역이다.

 남자라면 은근히 말이라도 붙여 보고 싶기도 하련만 괜히 찝적거리는 인상을 주는 게 싫어 아예 입을 다물고 가는데 그 시간이 두 시간 남짓. 겨울이라 고적하기만 한 계곡길을 그렇게 해괴한 정경을 만들며 삼공리까지 오고 말았다.

 

 삼공리에서 그녀는 한 음식점으로 들어가고 점심 때가 조금 지난 시각이라 나도 시장했지만 빨리 무주로 나갈 생각에 정류장에 섰는데,

 이놈의 버스가 언제 올라는지 꽤 한참을 기다려도 아니 오고 점심 먹고 나온 그녀가 휘적휘적 와 선다. 역시 버스를 타려나 보다. 에구 나도 밥이나 먹을 걸.

 아무튼 이젠 구면이다. 말없이 서 있는 게 더 불편하다. 어찌어찌 말을 붙이고 하다보니 얼래, 제법 자연스레 얘기가 오간다. 그도 나맨키로 혼자 여행하기 좋아하는 것, 새벽에 저쪽 안성면 쪽에서 넘어왔다는 것 등...

 크으, 이럴 걸 그 긴 두 시간을 그리 재미없게 내려올 게 뭐람. 못난 영혼들! 무녀리가 따로 있나 이런 영혼들이 무녀리지.

 버스가 오고 자연스레 나란히 한 자리에 앉아 신상명세가 오고간다. 내가 정선 산골에 산다는 대목에 가서 그녀 눈을 반짝이며 좋아한다.

- 한번 찾아가도 돼요?

 그럴 줄 알았지. 사람들은 오두막집에 산다는 말만 하면 다들 구경 오고 싶어 하니까.

 - 특히 전 오지마을을 찾아 다녀요

 그렇게 해서 전화번호도 주고받고....

 

 무주 터미널에서 자판기 커피 하나씩 마시고 전주 쪽으로 먼저 떠나는 그녀의 버스를 향해 무슨 연인 이별하듯 또 손까지 흔들어 주고 헐.

 

 누구는 나더러 은근히 선수라고 한다.

 선수...

 맞는 것 같다.

 어쨌든 전화번호까지 땄으니 오늘 한껀 올린 셈이다.

 그렇다고 누가 감히 나더라 뭐라 할까. 난 한번도 내가 먼저 껄떡댄 적 없다. 다 지들이 왔지 ㅋㅋ

 

 그래도 비아냥거리면 나 이렇게 말한다.

 

- 그려, 나 선순디 워쩔 것이여!!

 

 

                      2006.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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