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초여름

설리숲 2005. 5. 25. 20:05

 콧구멍으로 숨 쉬고, 허파로 호흡하고, 심장이 펌푸질을 잘 하며
두 다리가 멀쩡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가고, 손을 내밀어 다른 이의 손을 잡을 수 있고 적당히 지갑에는 지전이 몇장있어 삼겹살을 먹을만 하고, 칠십년대 치장을 한 시골 다방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올라, 덤덤미지근한 커피를 한 잔 하며 다방아가씨에게 이년, 저년 소릴 커피 한 잔 산답시고 조자룡 헌칼 쓰듯 내뱉는 사내를 만나고, 그래도 커피 한 잔 사주는게 어디냐고 하드를 먹으며 아무소리 하지 않는 다방 아가씨를 만나고...창호지를 바른 팔각창문의 가장자리는 몇년을 넘어가는 빛에 바래고 파리똥에 절어서 퍽이나 고상한 색감을 자아내는....그런 것을 한꺼번에 할 수 있는 날은 복받은 날이러라.


 예전 정선 갔던 이야기를 썼지러.
 못본 사람은 할 수 없구.
 오늘...이십여일 전에 집떠나 지리산, 진주, 함양을 떠 돌다 드디어 내 동네까지 들른 정선행님을 만났다.
 행님이라하나 나보다는 나이가 한 살 어리고, 아직 미장가니 그의 들쭉날쭉한 덧니 만큼 나보다는 훨 어려보인다.
 무슨 고민이 있어 정선 전화번호까지 죽여놓고 똥차를 몰고 전국을 도는지 모르지만, 어쨌던 그가 나를 찾아 왔다는게 고마운 일이다.

 아침 설거지를 끝내놓고 가마솥에 불을 지펴 올뱅이국을 한 솥 끓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도착했노라고.
 가마솥에 불은 대어놓고 어머님께 맡겨놓고는 얼릉 나갔다. 지난 삼월 스므날 만났으니 벌써 삼개월이 다 되어가네.
 전화로야 몇번을 통화를 하고 편지 왕래도 잦았지만, 사람이란 무릇 만나서 손 흔들어 악수하는 맛도 맛이려니와 글과 편지로는 다른 마주 앉아 표정을 읽어내며 대화하는 일이 더 구미에 당기는 일이다. 그러나 이 총각은 별반 말이 없다

 토종식당에서 삼겹살 삼인분을 구워 먹었는데, 지리산 매실농장에서 날품을 팔아서 번 돈으로 삼겹살 값을 지불한다. 이런 민망할데가...손님에게 밥을 사라하다니.
 기어이 일어서려는 내 어깨를 눌러앉히며 계산을 한다. 그럼 다방 커피는 내가 사쥐.

 걸어오는데 온갖 사람들이 다 인사를 한다. 저 여편네가 오늘은 웬 히피같은 사내와 저리 히히낙낙 걸어오는걸까 고개를 갸웃둥하는 사람도 있었겠고, 뒷말로 뭐라하는 사람도 있겠지. 오불관!

 원래 불륜의 맛이란 대 놓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뒤에서 손가락질하고 쑤군거리는 맛으로 하는 것이니까 푸헤헤헤헤.


 한양다방. 거기 주인마담은 내 토끼띠 계원 친구다.
 한껏 허스키한 목소리라도 노래방에가면 곧잘 노래를 보른다.
 늘 빨간 마티즈 5115호 차를 경쾌하게 몰고 차배달을 나간다. 물론 허벅지가 허옇게 보이거나 등판이 화들짝 드러나는 웃도리를 입은 다방아가씨와 함께. 참, 가끔은 손님이 담배를 주문하는가 자주 담배가게 앞에 차를 세우기도 한다.

 오늘은 친구마담이 기분이 좋은가 화장도 이쁘게 하였다. 하이룽..친구
 정선에서 온 내 친구에게 달달하고 맛있는 커피 한 잔 좀 타 주시게.
 오케이. 웃는다. 붉은 입술이 장미처럼 열렸다가 닫혀진다.

 다방커피잔은 얕다. 줄무늬가 그려진 겉모습이며 설탕과 프림을 따로 넣어 놓은 테이블의 컨셉과 가늘고 길다란 찻숟가락...나는 벌써 수전증이 있는가 총각의 커피잔에 설탕을 두 숟갈 넣어주며 손이 떨려 설탕을 조금 흘렸다
 프림도 구수하게 넣어준다.

 가끔 어두컴컴한 구석에서 모기들이 나와 다리를 물어뜯는다
인생에 대해, 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는 연신 종아리를 벅벅 긁어댄다
 총각은 무엇을 말할 듯하면서도 입을 다물고, 은근한 나의 유도질문에도 넘어오지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마흔 넘었으니 니 인생 니가 알아 사는거쥐. 나는 그가 길을 떠난 이유에 대한 모종의 정보를 가지고 있지만 더 이상 캐 묻지 않기로 한다.

 "시간 있으면 행님, 반야사 함 가 볼라우?"

 오후 두시의 빛살은 어여쁘다못해 광채 찬란하다.

 백화산 골짜기로 들어선다. 몇년전 새로 불사를 하여 생경한 풍경에 시멘트빛깔이
 희멀거니 들어오지만 절 초입에는 검은 기와가 켜켜로 쌓여있고, 허연 물감으로 이름자 쓰며 대대손손 안녕과 복을 빌어준다는 기와시주의 문구가 적혀있다
 절을 바로 지나 문수전에 오르기로 한다. 절에서 이백여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그 호젓함이나 계곡을 따라 좁은 길을 나무 그늘 사이로 걷다보면, 헐...애인 있으면 이런 곳으로 데려와 뻐뻐나 맘대로 해야지 하는 맘이 저절로 든다.

 백여미터는 그냥 편안히 갈 수 있는데, 백여미터는 그냥 80도 경사의 계단을 올라가야한다. 계단 옆으로 와이어를 잡아매 놓았는데 발걸음이 허술한 사람들은 반드시 이 와이어를 붙잡고 가야한다. 철도 침목을 오십센티정도 잘라 계단을 만들어 놓았는데 헉,헉 소리가 난다. 그렇게 산꼭대기쯤 올라가다 보면 커다란 바위 위에 문수전이 안정되게 놓여져 있다.

 난간을 앞에 두고 아래쪽 계곡을 내려다보면 온통 세상을 푸른 빛, 푸른빛 투성이다.
 하늘도 푸르고 산빛도 푸르고, 휘감아 돌아가는 물빛도 푸르다.
그 푸른 공간을 가르며 흰 새 한 쌍이 유유히 나르고 있다
좌우균형,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않고 공기를 헤엄쳐 나가는 흰 새.
 저 새처럼 나도 자유롭고 싶어...이런 오래된 감탄사 말고...울컥 목젖을 흔들며 올라오는 원초적 자유에의 갈망.


 새는 몇 번을 원으로 돌아 계곡을 제 눈안에 쓸어담는다.

 나도 새의 몸짓을 따라 몇번을 계곡 속에 눈을 담근다.

 문수전 동그란 쇠문고리를 가만히 연다.
 문수전이니 당연히 문수보살님이 계시겠지
 방석도 놓지 않고 육중한 몸을 꿇어가며 절을 한다.
 우두둑 관절이 꺾이는 소리가 나고 나는 바닥에 닿은 손바닥을 위를 향해 뒤집는다
 그 간단한 행동이 마음 끝자락에 온전히 닿았을 때는 손바닥을 뒤집는 행위가 그렇게 경건할 수가 없다.

 담아 놓지 말고, 움켜쥐지 말고, 그저..모든 것들이 승화될 수 있도록....
 속으로 가만히 옹알거린다.

 사랑도, 미움도..원망도, 기대도..그 모든 욕심들이 이렇게 손바닥으로 피워 올리는 연기같은 공양이 되길.

 바깥으로 나와 다시 난간 앞에 선다.
 푸른 계곡을 돌아나온 시원한 바람이 원죄까지 씻어 갈 것같다
 스치는 바람에도 풍화되는 그런 죄.
 업장과 인생도 그러했으면 좋겠다.


   2004. 6. 12. 전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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