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외과병동

설리숲 2005. 5. 22. 19:31

 

 오전에 편지를 받다.

 강릉의 한 병원.

 입원한지 겨우 나흘 째인데 벌써 발빠르게 병원으로 편지를 띄워주는 친구가 하나 있다.

 

 속도화 디지털화만 추구하는 요즘 세상에 이 친구는 굳이 구식 종이편지를 고집한다. 나 사는 산골로 그의 편지는 무시로 올라오곤 하는데 내 장기도보 중에는 보낼 주소가 없어서 얼마나 답답했을까. 작년 여름도보 때는 내가 수시로 편지를 보내주었는데 이번엔 덜컥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끙.

 나이는 마흔이 넘어 중년으로 치닫는 아줌마가 엎드려서 편지를 쓰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나 또한 답장이란 숙제가 생기지만 그런 숙제라면 밤을 새도 좋으리.

 

 강릉연세병원,

 근사한 신식 건물에 첨단 장비를 갖춘 병원이다.

 허나 아무리 그래도 입원병동이라는 게 늘 그렇듯이 70년대 그 풍경이다. 소독약 냄새, 칙칙한 환자복, 삐걱거리는 침대, 세탁이 늦은 시트 등.

 병동에 있으면 세상이 온통 우울하고 칙칙해 보인다. 날씨는 맑아도 늘 잿빛인 것이다.

 내가 들어 있는 병동도 그 풍경이어서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 영락없는 그 분위기다.

 병원에 나무 한 그루 없고 설사 있더라도 잎은 진즉 다 떨어져 버렸을 테지만 침대에 누워 잿빛 바깥을 보고 있노라니 왠지 죽음을 코앞에 둔 백혈병소녀처럼 센티멘탈해지기도 하는데,

 그나마 외과병동이어서 좀 나은 편이지만.

 

 그 낭만적인(?) 심경에 70년대식 연애편지를 받고 보면 여긴 21세기가 아닌 진짜 70년대의 낡은 병동인듯한 착각이 드는 것이다. 나는 영락없는 백혈병 소년이 되고, 가로수에 새순이 돋는 날 죽고 말 것이라는.....

 

 물리치료실로 내려가니 김기덕의 '골든팝스'가 흘러나온다. 엘비스 프레슬리, 자니 허튼, 조안 바에스, 수잔 잭슨, 스키터 데이비스의 추억의 팝송들이다.

 오늘 분위기 진짜 왜 이래-

 수잔 잭슨의 <Ever Green>이 흐를 때는 중학시절 연탄불 때고 가난하게 살던 춘천 후평동 시절이 필름처럼 지나간다. 낮은 담장 너머 골목으로 동네 형이 지나가며 휘파람으로 불던 그 노래다.

 

 병원이라 해서 그리 삭막하지만은 않은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난 이 분위기가 좋아 물리치료실 들어가는 게 은근히 기다려지기도 하는데.....

 

 물리치료실 통유리 너머 저만치 강릉 역사(驛舍)가 내다보인다. 

 영하 12도의 매서운 바람이 휩쓸고 지나가는 역광장을 연신 가는 사람 오는 사람 종종거리며 가로지르고,

 불현듯 나는 또 가슴이 뛴다.

 

 병이다.

 언제부터 생긴 병인지는 모르나 기차만 보면 가슴이 휭해지면서 어디론가 떠나고픈 몹쓸 병이 다시 도지는 것이다.

 

 여행이 좋아 길위에 나서고, 그 길위에서 사고를 당해 삭막한 병동에 누워 있으면서도 여전히 마음은 그곳에 있으니 내 참!

 어쩔꺼나 팔자려니.

 필시 내 죽음은 길위에서 맞으리니.

 

 나 가거든 누가 좀 후세에 전해주오.

 그놈은 도보여행하다 장렬하게 전사하였노라고.

 

 

                              2005.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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