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화개장터 불에 타다

설리숲 2005. 4. 14. 13:56

섬진강변의 매실농원, 연일 내리붓는 불볕.
온통 초록색의 세계다. 보기엔 참으로 아름답고 낭만적인 한 폭의 풍경화다.

그러나 정작 그곳서 일하는 사람들의 하루는 정말 고되다.
잠시도 쉬지않고 움직이는 사지,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는다. 여름해는 왜 그리 긴지 일해도 일해도 태양은 아직도 중천.....

이렇게 하루종일 사우나를 하고 나면 저녁엔 축 늘어진다. 그래도 나는 밖으로 나간다. 밤의 섬진강변은 참으로 아름답다. 강가를 오르내리며 시원한 바람을 쐬면 그 청량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게다가 보름 무렵이라 웅자한 지리산 능선 위로 달이 떠오르면 이 세상이 아닌 피안의 어느 세계에 와 있는듯한 신비감으로 가득 찬다.

지난 토요일은 좀더 멀리 화개까지 산책을 나갔다.
집 떠나온지 여러 날이 지나 그리운 사람들에게 전화를 했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자정을 넘기도록 전화부스를 전세내고 있었으니 꽤 오래 한 셈이다. 오천원짜리 전화카드를 석 장이나 다 쓰고 나서야 부스에서 나왔다.

장터를 나와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화개 앞에 새로 다리가 놓여 그곳을 건너면 전라도 광양땅으로, 내가 있는 매실 농원이 그 인근에 있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수상한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아니나다를까 갑자기 요란한 사이렌소리가 나고 깊은 잠에 들었던 화개 일대가 삽시간에 난리법석이 났다.

불이다. 화개장터에 불이 났다.
다리 건너 화개장터에서 시뻘건 불기둥과 시커먼 연기가 밤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긴박한 상황이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구경하는 것 밖에는....
강건너 불구경이라지 않는가.
강건너는 무슨, 나는 다시 다리를 건너 장터로 갔다. 더 가까이서 보려고.....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게 처첩간의 싸움과, 불구경이라지 아마, 쩝.

다행히 불은 바로 잡혔지만 그래도 장터는 시커먼 잿더미로 남았다. 모두가 철시한 한밤중이라 사람이 없었기에 천행이었다. 다음날 보도에 의하면 천막 14동이 전소됐다 한다.

농원으로 돌아오면서 사뭇 노래 하나가 입가에 맴돌았다.


  구경 한번 와 보세요
  보기엔 그냥 시골 장터지만
  있어야 할 건 다 있구요
  어느땐 불구경도 한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켠으론 찜찜한 기분도 없지 않았다.
불구경은 한번 잘 했지만 남의 불행을 즐기는 이 인간의 잔인함이여!!

 

   2004. 6. 8.

'서늘한 숲 > 햇빛 속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길은 나서야겠는데 눈은 점점 내려 쌓이고  (0) 2005.05.22
나는 도사님 너는 왕꽃선녀님  (0) 2005.05.20
고민  (0) 2005.04.13
구절리로 떠나다  (0) 2005.03.21
화이트데이  (0) 2005.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