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지몽
드라마 ‘대조영’을 보는데,
당(唐)의 측천무후가 정신이 투미해지고 판단력도 흐려지면서 노망 끼가 보인다. 뜬금없이 나라에 역모를 꾀하는 자들이 있다면서 꿈에 선황이 일러줬다는 거다.
나라가 망하려면 군주가 황당무계한 징조를 보이는 게 역사적으로 보아 당연한 수순이다. 아마 누구 애먼 신료 잡아 족쳐 황궁을 피바다로 만들 것 같다.
이렇듯 미리 앞날을 예견하는 예지를 보는 걸 선몽이라 하는데 태몽도 일종의 선몽이랄 수도 있고, 대개는 누군가 잘 아는 사람이 나타나서 앞일을 일러준다. 그것이 길한 일이든 흉한 일이든.
그런데 공교롭게도 ‘대조영’이 방영되기 그 두어 시간 전 오락프로에 가수 김범룡이 출연했다. 공교롭다고 하는 건 나는 오래 전 김범룡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 그게 예지몽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 새파란 20대 중반이었을 때다.
잘 아는 소녀가 있었다. 집이 가까운 것도 아닌데 어떻게 친하게 됐는지는 모르나 아무튼 뻔질나게 우리집엘 놀러오곤 했다.
17살짜리 그 아이는 김범룡의 열렬한 광팬이었다. 김범룡이 누구던가. 80년대 바람처럼 나타나서 가요계를 뒤흔들던 당시 최고의 스타였다. 그 아이뿐만이 아니라 연모하던 소녀들이 어디 한둘일까.
근데 내 눈에도 그 아이의 그를 향한 연정은 정도가 좀 심해 보이긴 했다. 그의 노래가 라디오에서 나올 때는 정신이 몽롱해져 자신을 잊고 있는 게 역력해 보였으니까.
그런 어느 날 아침에 일찍 그 아이가 집엘 왔다. 평소와 달리 잔뜩 얼굴이 굳어 있었다. 어디가 아픈가.
아니나 다를까 나를 보더니 그냥 엎드려서 펑펑 우는 게 아닌가. 그 아이가 우는 걸 보는 게 나로선 처음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울더니 흐느끼는 음성으로 하는 말이 오빠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오빠란 김범룡을 말하는 건데, 꿈에 김범룡이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이른 아침에 달려와서 그 소동을 피운 것이다.
참 너두 어지간한 애구나. 별 시답지 않게 출근을 했는데, 저녁에 퇴근해 돌아오니 세상에!
가수 김범룡이 교통사고를 내고 구속됐다는 뉴스가 있었다. 진짜였다. 소름이 돋았다. 정말 그 아이가 선몽을 한 거였다.
난 꿈 따위는 믿지 않았다. 그냥 피곤하면 꿈을 꾸는 거고 그냥 꿈은 꿈일 뿐이라 치부했었다. 그랬는데 그날 그 아이의 선몽을 경험하고 나서 그때부터 꿈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게 되었다.
그 아이는 지금은 30대 중후반이 돼 있겠다. 어디서 살며 아직도 김범룡을 몽매간에 그리고 있을까 불현듯 생각이 났다.
2 . 현아
친구가 전역을 해 왔다.
입대하기 전 좋아하던 여학생이 있었다. 일방적인 연모였다. 혼자만의 애달픈 사랑을 아프게 간직한 채 외롭고 고달픈 군생활을 했었다. 그 여학생의 이름에 ‘현’자가 있었다. 입대하고 나서 김범룡의 ‘현아’가 크게 히트했다. 놈은 가슴을 삭이고 삭이며 줄곧 ‘현아’만 노래했다고 한다.
그리고 한 2년쯤 지났던가, 아님 겨우 1년을 지났던가.
놈이 느닷없이 그녀의 소식을 전해왔다. 그녀의 가정이 파탄났단다. 오 하느님. 그의 가엾은 사랑이 진작 끝난 줄 알고 있었건만 놈은 내내 그녀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잔뜩 취한 채로 늦은 밤 인적이 사라진 공지천변 분수대에 앉았다. 놈은 거기서 현아를 불러 제꼈다. 3년을 불러대던 노래라 그런지 아주 그럴싸하게 잘 불렀다. 괜시리 코끝이 찡해 왔다.
전역하고 나서도 그녀를 추억으로 묻어 버리지 않고 놈은 또다시 그녀를 향해 어정거렸다. 하지만 3년의 세월,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지 않으면 이상하지. 원래도 놈의 연모를 퇴박하던 그녀였다. 어찌어찌 한번은 만난 것 같았다. 그게 끝이었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약혼자가 있다더라구 아주 담담하게 주절거렸다. 가엾은 청춘의 사랑은 그렇게 고통스럽게 막을 내렸다. 그 남편이라는 작자가 성적으로 좀 괴팍한 놈이었나 보다. 마누라한테는 흐지부지 대하는 놈이 어느 날 강간미수로 기소가 됐다는 거였다. 그것도 평소 친하게 지내던 유부녀를 제 친구 몇 놈이랑 담을 넘어 그 짓거리를 했다는 것이다. 유구무언이다. 그녀의 불행은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아니 사나이의 순정을 밟은 그녀의 불행이 오히려 쌤통이라는 잔인한 쾌감을 느꼈지만, 그걸 나한테 주절주절 읊조리고 있는 친구 놈이 내겐 너무 비참했다. 그렇지만 내가 놈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뭐란 말인가. 그저 붙들고 앉아 술이나 마셔 주는 게 고작이지. 그놈의 술, 술, 술... 나도 새파란 청춘의 그 어름엔 술깨나 마셨다. 아니지, 마셨다기보단 그저 친했다고 해야 옳다. 그때나 지금이나 용량을 넘어서면 그저 대가리 처박고 꺼억꺼억 게워내는 게 일이었으니까. 그날도 놈과 마주앉아 딴엔 위로해 준답시고 젤 싫어하는 정치꾼들 이야기만 화제로 삼으며 마셨던 건데, 역시나 나는 속 내용물이 끓어올라 하수구에 엎드려 컥컥댔고, 놈은 시적시적 오줌을 깔겨대면서 ‘현아’를 목놓아 불러댔다. 김범룡 : 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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