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바람이 불어오는 곳

설리숲 2007. 6. 16. 18:34

 9월 30일.

 잠자리가 편하면 아무래도 잠이 길어진다. 눈을 뜨니 일곱 시 반이 넘었다.
 서둘러 세수를 하고 진부 터미널로 나갔다. 월정사행 버스는 배차 시간이 멀어 그냥 걸어가기로 한다.
 읍내를 벗어나면 국도변으로 당근밭, 양파밭들, 그리고 거기 엎디어 일하는 아낙네들. 어딜 가든지 사람들은 그렇게 산다. 배낭 메고 유람하는 내가 사뭇 부끄러워진다.
 월정 삼거리에서 늦은 아침. 6번 국도는 한적한 길이다. 그러기에 차들이 더욱 무섭게 질주한다. 여행길에서 늘 느끼는 건 우리나라 도로는 일방적으로 차에 맞춰져 있다는 것. 갓길이 없는 도로가 무수하다. 대형 화물차라도 지나가면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다.
배낭은 무겁고 발도 아파 오고, 서늘한 날인데도 반팔 반바지 차림이 하나도 춥지 않다.
 상쾌한 바람.
 나는 바람이 불어오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일종의 조울증이다. 바람은 어디서 오는지 저 바람은 어디로 가는지. 나는 내가 바람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어디 한군데 머물지 못하고 끊임없이 표랑하는.
 나의 최종 목적지는? 나 역시 알 수가 없다. 그저 길이 있으니 길을 갈 뿐이고 길은 어디로 이어지는지 또한 알 수가 없다.

 길가에 앉아 잠시 쉬고 있으려니 만감이 교차한다. 나는 언제나 이 방랑을 접을 텐가. 늙어서 쓰러져 죽는 마지막 순간에도 나는 길 위에 있겠지. 다음 생에는 바람으로 태어날까. 

 

 

 


 월정사
 전나무의 향긋한 냄새. 입구는 전나무 숲길이다. 몇 년 전의 내소사도 전나무 길이었다. 그때는 겨울이었고 지금은 가을이라 나무가 내뿜는 향기가 어질머리를 돋군다. 어두운 숲 길은 냉랭한 한기가 돈다.

 월정사를 들렀다가 다시 상원사로 가는 길.
 계곡 양편으로 높다란 산줄기가 뻗었다. 산맥은 바야흐로 가을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물도 산빛을 닮아 그 색깔로 흘러가고.
그리고 비포장도로. 그러나 비포장도로도 한적하지만은 않다. 쉴새없이 오가는 승용차와 버스 화물차들. 그들이 지나간 길에는 자욱하게 먼지가 서리곤 한다.
 굳이 이런 곳에도 길을 내야 하는 건 삶들의 욕심 탓일까. 머잖아 이 길에도 시멘트가 부어지겠지.
 내 옆을 지나가는 차 안의 그들은 예외없이 나를 훑어보며 간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터벅대고 걸어가는 내가 안돼 보이는가 보다. 기실 내가 안됐어 하는 건 자기들인 줄은 모르겠지. 아니, 어쩌면 이 서늘한 가을 날에 선정적이리 만큼 노출 심한 옷차림의 내가 좀 신기할 수도 있겠다.
 이 사람들아 나는 당신들을 비웃는다. 그럴려면 뭣하러 이 가을산에 왔느냐.
 그저 눈앞의 쾌락에만 보고 즐거워하다가 결국 이 세상에 온 진짜 목적도 알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려느냐. 과감히 문명의 이기를 버리라. 당장 그 차에서 내려 저 계곡 안으로 자연 안으로 걸어가라.

 산속의 밤은 일찍 내린다. 진즉에 땅거미가 지고 바람이 한결 차다. 텐트를 치고 그 안에 드니 웃음이 배어 나온다.
 이 드넓은 세상에 텐트 넓이야 한 평도 못 되건만 하늘 가리고 잠에 들 수 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 놈인가. 



   2000.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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