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를 뿌렸으면 뿌린 놈이 거둬야지. 지난봄, 씨가 있어서 그저 뿌렸을 뿐인데... 뿌린 놈은 돌볼 염도 없이 제 신세로만 나돌아 다니더니. 함양에서 돌아오니 오이는 저 혼자 싹을 틔우고 저 혼자 덩굴을 뻗어 저 혼자 꽃을 피우고 저 혼자 열매를 달아 저렇게 저 혼자 늙어 있었다. 내가 한 일이란 무성하게 자란 키 큰 잡초들을 뽑아준 것이 전부다. 저 혼자 노랗게 늙어 간 것에 공연히 마음이 애틋하다.
어느 드라마의 대사를 기억하고 있다.
“평생을 업고 가는 거다. 너무 무거워 평생을 업고 갈 자신이 없으면 아예 첨부터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네 길을 가는 거다. 비겁한 것 같지만 그게 너나 상대방을 위한 현명한 길이지”
남녀의 관계에 대해 노인이 청년에게 일러주던 말이었다. 내 머리를 후려치는 대사였다. 아주 오래도록 내 삶에 깊이 관여하고 다잡아줄 명대사다. 뿌린 놈이 거둬야 한다. 거둘 마음도 없고 능력도 없으면 애시 뿌리지를 마라. 그나마 저 오이는 노각은 따 주고 새로 커가는 파란 오이는 거둬 먹고 있으니 무책임에 대한 자책은 덜 하리라. 그런데. 언젠가부터 내가 무책임하게 버린 씨가 자꾸만 가슴을 옥죄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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