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부끄러움과 함께 어른이 된다

설리숲 2008. 7. 28. 00:50

 

 

 스무골에서 지낼 때는 웃통을 벗고 산다. 알몸으로 나가면 미풍에도 느껴지는 바람의 감촉이 좋다. 어린시절 발가벗고 뛰어다니면 어깨를 넘은 바람이 등골을 쓸고 내려가는 그 느낌이 감미롭고 황홀하던 기억이 있다.

 

 어느 날 나무 그늘에서 노인들이 보이지 않으면 가을이 온 걸 느낀다. 여름 내내 시골마을 어디든 시원하게 쉴만 한 곳엔 삼삼오오 노인들이 있다. 둥구나무 아래나 밭 언저리의 원두막, 또는 언제적 지어졌는지 모를 고풍스런 정자나 면에서 지어준 현대적인 정자 등.

 그러다가 문득 보면 노인들이 안 보인다. 아하 이미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있다는 걸 깨단한다.

 그럴 때의 내 기분도 바람만큼이나 서늘하다. 계절이 차차 기울어 깊은 조락이 다가온다는 것에 공연히 서운하고 불안하기까지 하다. 마치 어린아이가 이젠 더 이상 내에서 멱을 못 감아 아쉬워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랄까.

 그보다는 내게 있어 벌거숭이의 어린시절이 다 끝났음을 절감하는 서러운 성장통 같은 것이기도 하다.

  

 

 예나 지금이나 가을을 좋아하지만 되돌아보면 후평동 살던 그 시절엔 여름이 가장 즐거웠던 것 같다. 시의 가장 변두리 지역이라 여전히 논과 밭이 질펀해 주민의 반 정도는 농사를 짓던 곳이었다. 촌에서 시내로 이사를 나왔지만 여전히 나의 생활은 농촌의 풍요로운 그것이었다. 들을 질러 개울이 흐르고 있어 그 개울을 중심으로 한 산내들이 아이들의 생활터전이었다.

 하루 진종일 물가에 나가 놀았다. 

 말해 무엇하리. 죄다 벌거숭이였다. 남자애건 계집애건 모두 벌거숭이로 멱을 감고 놀았다. 여자아이들의 은밀한 부분이 보이기도 했다. 대수롭지 않았다. 여자아이들 앞에서 보란듯이 쉬를 갈기기도 했다. 대수롭지 않았다. 여자애들은 사내처럼 서서 우줌 누는 걸 선망했다. 어쩌다 개울가 방죽 밑이나 동네 실골목 담장에서 서서 쉬하는 여자아이를 볼 때가 있었다. 나는 못 본척 그냥 지나치지만 한번은 저쪽에서 나를 먼저 보고는 어찌나 부끄러워하던지 내가 민망할 정도였다. 사내아이들 앞에서 다 드러내놓고 놀던 아이가 서서 오줌 누는 걸 들켰다고 그렇게도 부끄러워하는가.

 인식의 차이 아니겠는가. 홀라당 벗고 있어도 마음가짐에 따라서 부끄럽지 않은 게고, 옷을 입고 있어도 치마 한쪽이 강동 들려올라가면 허벅지 보이는 게 부끄럽기도 한 것이다. 수영선수는 차치하고라도 테니스선수들의 옷차림만 해도 참말 노출이 심하다. 치마를 입었으되 시늉으로만 걸쳤지 입었다고 할 수도 없다. 그치만 선수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요즘은 어떻게든 더 노출하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 반면 잠옷이나 파자마 같은 옷이야 온몸을 다 감싸지만 그걸 입고 밖에 나가면 부끄러운 옷인 것이다.

 

해 두해 가고 고학년이 되자 아이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내애들은 여전했지만 계집아이들은 팬티를 입고 멱을 감았다. 이상한 일이다. 그러자 여자아이들의 몸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동안 여러 해를 숱하게 보아왔던 계집애들의 팬티 속 그곳이 신비하면서도 은밀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이제 더이상은 어린 날의 그녀들이 아님을 막연하게 느끼며 왠지 서운하고 일말의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러면서 나도 이젠 팬티를 입을까 어쩔까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 몇몇은 중학교엘 올라갔다. 개울은 주인이 바뀌었다. 그나마 팬티라도 입고 물놀이를 하던 계집애들은 더 이상 개울에 나가 멱을 감지 않았다. 어떤 아이는 훨씬 전부터 개울가를 떠났다. 가슴이 뾰족하게 솟아오른 것을 보았는데 아마 그때부터 안 보였을 것이다. 사내애들도 더는 벌거숭이로 놀지 않았다. 덩치가 크던 어떤 아이는 고추 언저리에 터럭 한개가 나왔다고 어른이 되는 거라며 자랑하더니 털도 없는 아이들 하고는 놀기가 싫었는지 역시 어느날 개울가를 떠나 버렸다. 개울은 철없는 벌거숭이 꼬맹이들이 차지했다. 사내아이건 계집아이건 죄다 벌거숭이였다.

 그것이 마음을 짠하게 했다. 이젠 나도 개울을 떠나야 하는 것을 감지한 것이다.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아이들은 스스로 그걸 터득해 갔다. 그때의 서운함과 아쉬움이란. 이제 다시는 천진난만한 어린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저 앞만 보고 걷고 달리고 그렇게 어른이 된다. 결국 어른이 되는 게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닌데도 벌거숭이들의 꿈은 어른이 되는 거였다.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하면 어른이 되는 것이다.

 

 개울은 여전히 꼬맹이들이 뛰어다니고 있었지만 동무들이 안 보이는 개울은 참으로 쓸쓸했다. 마치 가을이 되어서 꼬맹이가 더는 물장구를 못 치는 것을 섭섭해 하고 아쉬워하는 것처럼 계절감이 아닌 세월의 흐름을 내 어린 마음으로도 느꼈다.

 내게도 털이 하나씩 나고 수염도 났다. 물장구 치던 동무들은 저만의 생활로 들어갔다. 여자아이들과는 그후로는 전혀 교류를 하지 않았다. 간혹 골목길에서 마주쳐도 그저 씨익 한번 웃고는 이내 등지고 멀어졌다. 남자아이들과도 전처럼 가깝게 지내는 일이 없어졌다. 그렇게 소원해지더니 끝내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영원히 소식을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이다.

 

 

 동리의 노인들이 그늘쉼터에서 사라지고 문득 서늘한 바람을 느끼는 어느 날 나는 까닭없이 서운하고 불안해진다. 이젠 여름이 끝나고 밤이 길어진다는 생각과 함께 길고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는 그 알 수 없는 불안감. 동무들이 하나둘 개울가를 떠날 때의 그 아쉬움과 서운함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것이다.

 어느 때부턴가 나도 이미 웃옷을 입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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