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입냄새

설리숲 2010. 6. 7. 00:40

 진주 문화예술회관에서 기타연주회를 관람했다.

 기타는 내가 연주하는 건 좋아하지만 남의 연주를 듣는 건 따분하다. 혹, 로드리고 협주곡처럼 장쾌한 스케일의 협주곡이거나, 대형 오케스트라까진 아니라도 다른 악기와의 협연이라면 그나마 들을 만도 한데 기타독주곡은 영 재미가 없다. 기타뿐이 아니라 모든 악기는 독주가 재미없다. 성악도 반주 없이 연주한다 하면 그것 또한 얼마나 맨송맨송하고 따분한가.

 

 그래도 공짜표가 아닌가. 그것도 로얄석 티켓이다.

 물론 공짜표여서는 결코 아니다.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방, 특히 촌에서는 문화예술을 접하기가 어렵다. 모든 문화문물은 도시에서 머물고 도시를 향유하다 도시에서 사라진다. 촌놈들은 그 흔한 영화 한 편 보는 것도 번거롭고 어렵다. 그러니 기타연주면 어떤가. 그냥 그들만이 누리는 문화라는 걸 접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예전 커피가 교양의 상징이던 때가 있었다. 진종일 밭뙈기에 엎드려 기던 시커먼 농사꾼일지라도 근사하게 커피 한잔 마시고 나면 세상 가장 세련된 교양인이 된 것처럼 거나하던 그런 기분이라도 느끼고 싶었다.

 또 하나는 일상이 더 따분했다. 철이 늦어 여전히 찻잎은 더디게 올라오고 바쁘지 않은 일상이 지루하기도 했다. 결정적인 것은 내가 무척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명색 음악을 좋아하는 내가, 더 솔직하게 말하면 남들에게 음악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지성인인 것처럼 보이고 싶은 내가 아니 간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알렉세이 소콜로프. 당연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이지만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기도 하고. 기타의 세계에 대해서는 일천한지라 기껏해야 로드리고나 타레가, 세고비아 정도나 들어봤을 뿐더러, 기타라면 그래도 에릭 클랩톤이나 지미 페이지, 또는 잉위 맘스틴이 펑크 스타일의 머리를 하고서는 내내 염세적인 표정으로 관객들을 희롱질하는 게 멋진 연주라고 여기는 나였다. 실제로 그들의 연주는 사람의 뇌를 갈가리 찢는듯한 파괴력이 있어 그 중독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또한 영화배우이면서도 기타에 일가견이 있는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그 라티노 특유의 우수 찬 눈빛에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연주하는 모습은 얼마나 오금 저리게 멋있던가.

 그러니 얌전하게 앉아서 시종 똑같은 자세에 똑같은 표정으로 일관하는 사람의 기타독주야 애시 재미라는 걸 기대하지도 않았다.

 알렉세이 소콜로프. 러시아의 떠오르는 신예 기타리스트라고 한다. 아무려나 나는 아늑하고 숙연한 공연장을 느끼고 싶었다. 기타고 나발이고 도시인들만이 누리는 세련된 문화를 접한다는 건 공연히 가슴 설레는 일이다. 더구나 나는 음악을 좋아하는 고급 마니아니까.

 

 4월 하순, 봄의 절정기이지만 유난히 철이 늦는지라 꽤나 쌀쌀한 나날이었다. 그날은 기온이 더욱 떨어져 벚나무 잎이 찬바람에 떨고 오가는 사람들의 어깨도 추썩이게 만드는 저녁이었다.

 예상대로 연주회는 따분했다. 나 역시 소싯적에 통기타 두들겨대며 개폼 좀 잡았던지라 소콜로프라는 기타리스트의 연주는 참말 귀에 착 감기도록 아름다웠다. 다만 레퍼토리에 아쉬움이 있었다. 한 곡 정도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곡으로 했다면 관객의 호응을 좀더 얻었을 텐데. 어쨌든 공연장 특유의 분위기와 그 공간을 감미롭게 채우는 기타소리와 그의 연주솜씨는 아주 좋았다.

 더구나 내게는 냄새가 오래도록 남았다. 연주회 내내, 아니 연주회가 끝나고 반천으로 돌아와서도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냄새가 있었다.

 냄새,

 그렇다. 분명 그 냄새였다.

 두어 곡 연주됐을 때쯤이었을까. 범상치 않은 냄새가 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오래도록 길들여진 냄새. 입냄새.

그녀와 입을 맞출 때는 늘 그 냄새를 맡았다. 내게 향한 깊은 사랑을 그녀는 자신의 입으로 거침없이 토해냈고 무시로 그 입냄새를 맡을 때면 나는 늘 아찔하게 성적충동을 느끼곤 했다. 서로의 입냄새를 교환하며 나눴던 사랑은, 아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더라. 달콤한 입냄새로 나를 구속해 놓고 사랑은 덧없이 떠나 버렸다. 내게 있어 사랑은 그저 입냄새였다.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구속이었나. 얼마나 감미로운 충동이었나. 그것 하나로 나를 들뜨게 했고 흥분하게 했던, 중독에 빠져 행복하게 했던 그것.

 그밤, 벚나무 잎이 찬바람에 떨던 그 봄밤의 낯선 공간에서 잊고 있었던 그 냄새를 맡았던 것이다. 분명 내 뒷자리였다. 얼마나 가슴이 뛰던지. 묘하게 끓어오르는 감정들. 미묘한 몸의 떨림들. 뒷자리에 그녀가 와 앉아 있을까. 그럴 수도 있을까. 세상 사람들의 입냄새는 다 같은 것일까. 수만 가지 상념들이 넘나들며 나는 안절부절 몹시도 불안정했다.

 뒤를 돌아보고 싶은 욕망은 간절했지만 그 공간의 분위기는 너무나도 조용했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대번 눈에 뜨일 만큼 모든 것이 정적이었다. 하물며 고개를 돌려 뒷사람을 돌아볼 배짱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더욱더 마음만 달았다.

 1부 순서가 끝나고 휴식시간이 있었다. 비로소 만물이 움직이고 정적도 깨졌다. 뒤를 돌아보았다. 입냄새의 주인공이 앉았을 자리는 비어 있었다. 어느새.

 안타까움.

 휴식이 끝나고 다들 제자리를 잡고 앉았지만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빈자리가 많은 뒤쪽 어딘가로 옮겨 갔을 것이다. 아니면 그쯤에서 그만 퇴장해 나갔을런지도 모른다. 나는 어쩐지 후자였으면 좋겠다. 자리가 많아 제 편한대로 옮겨 앉는다면 너무나 평범한 사람인 것이다. 중간에 빠져 나가는 사람이라면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니까. 한동안 메마르게 지내던 나를 다시 흥분과 충동으로 이끌어준 사람이라면 평범한 사람이어서는 안된다. 그는 내 옛사랑의 입냄새를 가졌으니까.

 하지만 내 솔직한 심정은 창피하게도,

 정말 부끄럽고 민망하게도,

 실은 그녀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노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감미로운 입냄새로 나를 중독시켰던 희미한 그 옛사랑이 바로 내 뒤에 앉아 있지 않았다는 증거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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