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이 찾아들면서 축제는 시작됐다.
여의도로 올래?
오랜만에 얼굴 보는 사람에 대한 에티켓이 영 아니다. 하긴 그런 게 일종의 매력으로 보일 때도 있었다. 지금도 역시 그렇다.
뜬금없이 여수엘 가고 싶었다. 요즘 들어 괜시리 바다가 보고 싶었다. 사방에 바다가 널려 있건만 왜 남쪽 끝 여수가 보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다. 밝은 햇빛 아래 푸른 다도해 유람선을 타고 싶었다. 그래 배낭을 꾸려 집을 나섰는데 전화가 온다. 얼굴 볼래? 그러지머... 오랜만에 전화하는 저쪽이나 대답하는 내쪽이나 무미건조하다. 늘 만나며 같이 지내는 관계처럼 그저 그렇다.
여의도로 와.
여의도?
너른들판.
너른들판?
축구 응원하는 날이잖아.
아아 축구 응원한다고 거길 갔구나. 그가 과연 얼마나 축구를 알까. 오프 사이드는 알까. K리그에 어떤 팀들이 있는지는 알까. 김주성이 FC서울팀 선수인줄 알고 있을지도 몰라. 하긴 그게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다. 4년 만에 한 번씩 찾아오는 축제를 그냥 즐기는 거지. 크리스천이 아니어도 크리스마스를 즐기듯이.
전철마다 빨간 옷 맨드리의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금방이라도 폭풍이 몰아칠 듯이 분위기가 팽배하다. 설렘과 기대. 일촉즉발 누군가 시작하면 일제히 우레 같은 함성이 폭발할 것 같다. 대한민국의 땅덩어리는 목하 거대한 흥분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시청 역에서 우루루 내린다. 차 안이 철 지난 바다처럼 쓸쓸하다. 자정이 넘었지만 경기까지는 시간이 많다. 그를 만나서 뭐하지. 어색하진 않을까. 하긴 안가도 그만이다. 그를 꼭 만날 필요는 없다. 짐작컨대 분위기에 휩쓸려 아무 생각 없이 내게 전화했을 것이다. 그래도 이따금 생활의 골목골목에서 생각나고 떠오르는 사람 있어 그에겐 내가 그 사람인 것 같다. 그거면 족하지. 사실은 나 역시 길거리 응원리라는 걸 한번 보고 싶기도 했다.
여의도 너른들판엔 벌써 분위기가 달아올라 있었다. 대형 스피커에서는 끊잉없이 음악과 함께 응원구호가 터져 나온다. 바로 코앞엔 아파트 단지다. 응원도 좋지만 주민들이 몹시 불편하겠다. 때때로 우린 다른 사람의 배려를 강요할 때가 있다. 지금이 어느 땐데 대한민국이 월드컵 16강에 들어가려고 하는 중요한 순간인데 우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기로서니 그게 대순가. 당신들도 한국 국민이라면 이런 소음은 감내해야 하오. 아니 감내가 아니라 당신들도 나와서 여기에 동참해야 마땅하거늘 잠은 무슨 얼어죽을 잠이란 말이오. 마치 응원하러 나오지는 못하더라도 시끄럽다고 투덜대기라도 하면 바로 매국노로 몰아붙일 수도 있는 상황이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사회로부터 용인되는, 아니 스스로 용인하는 위법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스포츠가 가진 위력은 엄청나다. 어느 유능한 권력자도 하지 못하는 것을 스포츠는 거뜬히 해낸다. 경직된 남북관계도 스포츠가 풀어 주었다. 유명한 핑퐁외교는 중국과 미국에 일대 전환을 불러왔고 더 나아가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일본 지바에서의 탁구 남북단일팀 출전으로 엄청난 파장이 일어 금방이라도 통일이 될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전두환은 교묘하게 3S정책으로 백성을 우민화해서 자신의 권력욕을 맘껏 누렸다. 프로야구와 프로축구를 출범시키면서 우매한 백성들은 그 달콤한 마력에 탐닉하기도 했다.
2 002년의 여름은 그 스포츠의 위력이 가장 진가를 발휘했던 때였다. 어느 누구도 하지 못했던 국민의 화합을 축구가 이룬 셈이다. 그 엄청난 축구의 매력에 빠져 그 뒤안길의 어두운 그림자는 누구도 보질 못했다. 아니 보려고 하지 않았다.
한국인에게 축구는 그런 것이다. 수많은 스포츠 종목이 있지만 축구는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종목이기도 하다. 엄청난 돈으로 지원을 해가며 떠받들고 있는 게 축구다. 그럼에도 한국의 축구는 그리 강하지가 못하다. 자고로 세계축구의 변방에서 얼쩡거렸지 그 주류 속으로 들어가 보질 못했다. 2002년의 화려한 축제는 그래서 우리들 가슴에 한바탕 꿈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국축구는 변방이다. 한국인이 아닌 보통의 사람들은 한국축구를 모른다. 여전히 최약체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월드컵 때만 되면 늘 만만한 상태로 지목되고 그게 우리에겐 더 불리하다. 강팀에겐 아예 전력을 다하지 않고 만만한 팀에게 전력을 쏟아 승점을 얻으려는 전략이 가장 손쉬운 방법인 것이다. 약팀들은 자신의 실력에 비해 더 초라한 성적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6강에 든다는 것은 대단한 꿈이다. 전통작인 강호들에게는 보편적인 것이 한국팀에겐 실로 위대한 도전이요 꿈이다. 16강에 이름을 올리면서 비로소 사람들은 한국이란 이름의 축구팀을 기억하게 되고 서러운 변방에서 주류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밤 사람들은 흥분으로 들끓고 잠못 이루는 밤이 되는 것이다. 사실 아파트 주민들도 시끄러워서가 아니라 그 설레는 흥분 때문에 잠을 안 잘 것이다.
태극기 앞으로 와.
대형 스크린이 있고 양쪽으로 대형 태극기와 박지성 브로마이드가 걸려 있다. 현장은 전화통화를 할 수 없게 시끄러웠다. 오랜만의 만남. 그러나 부련하거나 어색하지 않은. 옆집에 살면서 항상 만나 왔던 것 같은 느낌. 역시 붉은 티셔츠 차림이다. 색다른 매력이다. 평소에는 그저그런 수더분한 사람인데 월드컵이라고 다른 젋은이들에 휩쓸려 즐기려고 하는 색다른 면이 좋아 보인다. 2002년 때도 그랬다. 그에게 일행이 있었다. 그래서 편안했을 것이다. 왜 뜬금없이 나를 불러냈는지 모르겠다. 아무려나 서먹하지 않은 만남이 몹시 좋았다. 그쪽에서야 나보다는 축구경기에 더 관심 있었을 것이다. 아니 축구가 아니라 지루한 일상에서의 하룻밤 일탈을 즐기고 싶었을 것이다. 누구든 그러지 않겠는가. 새삼 따져보면 매일매일 천국을 거니는 것 같은 즐거움을 누리고 사는 사람이 지구상에 단 하나라도 있을까. 다들 일상이 지루하고 삶이 재미없는 것을 그래도 이따금 찾아오는 소소한 즐거움들이 있어 그나마 버티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월드컵 축구가 그 즐거움이다. 우리뿐만 아니라 지구 저편 나이지리아 사람들도 역시 그럴 것이다. 승패를 떠나 우리 모두는 일사의 지루함을 잊고 한바탕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더 열정적이기 마련이다. 그는 유난히 더 크게 목청을 돋구어 구호를 외쳐댄다. 목이 갈라진다. 그럴수록 얼굴이 더 생기가 돋는 것 같다. 스스로 만족하여 웃는 그의 머리에서 악마의 뿔이 반짝인다. 밤은 넘어가고 서서히 여명이 밝아 온다. 치열한 축구전쟁에서 양팀은 승부를 가리지 못한다. 모두 후회 없는 플레이를 펼쳤다. 주관적으로 볼 때 명승부였다고 본다. 사람들은 열광한다. 승부는 못 가렸지만 열망하는 16강에 도달한다. 열정적인 함성이 서울의 하늘로 날아오르고 환희의 아침을 맞는다. 새 역사를 쓰는 현장에 내가 있었다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어둠이 가고 여명이 밝아 오면서 축제는 시작되었다.
우루과이와 다음 관문을 다툰다. 승승장구 이겨 오랜 축제를 즐길 수도 있고 그 한 경기로 끝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루과이에 져서 짐 싸들고 돌아오더라도 축제는 끝나지 않는다. 앞으로도 월드컵은 계속될 것이고 변방에서 얼쩡거리던 한국이란 나라의 이미지는 서서히 세계 축구의 주류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비로소 오랜 침묵을 깨고 축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여명과 함께 우리들의 진정한 축제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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