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과제로부터 자유로워라.
우리는 높이 더 높이 올라가자.
그날 그 시각 나는 남한 땅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서 있었다.
안날 오후부터 세차게 비가 내렸다. 새벽에는 계곡으로 하얀 구름이 피어오르며 환하게 갰다.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오르기에 최적의 날씨였다. 내린 비로 대기와 숲은 한층 가뿐해졌다.
지리산.
구태여 말할 것이 있을까. 웅자하고 영험하면서도 가장 인간에게 친밀하게 가까운 어머니.
설악산은 경관은 현란하게 수려하지만 그 안에 사람이 깃들어 살지 않는다. 지리산은 수많은 민초들과 생명이 공존하며 탄생과 죽음 철학과 문학을 만들어내고 있다. 신과 인간이 서로를 그리워하며 지금도 끊임없이 영혼들을 깨우고 있는 곳이다.
울울창창 무성한 숲, 지리산에 와서 그 깊은 숲을 대할 때마다 멀지 않은 어느 때 사상과 신념을 위하여 목숨과 열정을 바친 수많은 빨치산들이 생각나곤 한다. 사상은 논외로 치고 새파랗게 뻗쳐오르는 정열을 누린 그들은 진정 행복했을 것임을.
아는 것이 많으면 결코 행복하지 않다.
바람이 실어다 주는 대로 시간이 이끄는 대로 고요하게 살리라. 그 안에서 지식은 골동품이요 말은 똥이다.
나도 제법 산은 타는 편인데 참말 오랜만에 오른 가파른 코스라 등산 때는 그럭저럭 올랐지만 하산 때는 다리가 제법 떨린다.
완희 씨의 포스가 대단하다. 나보다 처지지 않고 시종일관 앞서서 리드했다. 사나이 체면에 엄살 부릴 수 없어 의연한 척 했다. 며칠을 둘 다 알밴 다리를 하고서 서로의 상태를 물어 안부를 확인했다. 이 사람을 좋아할 것 같다.
10년도 더 전에 월정사에서 흐르는 음악을 듣고 매혹에 빠졌었다. 그리고 나는 그 악기를 손에 대기 시작했다.
자연이 주는 선물 오카리나.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이 만나 천상의 소리로 인간의 깊은 내면을 건드리는 악기. 생명을 일깨우는 소리.
장엄한 지리산의 어느 상수리나무 숲에서 오카리나만 불며 평생을 살 수 있을까.
그곳의 골짜기에 들면 나의 생명은 영원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어쩌면 진짜 그럴지도 모른다.
오지 않은 미래를 불안해하지 말자. 우리는 결국 그것과 하나가 되리니 그때가 되면 시작과 끝, 빛과 어둠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저 지리산 자락의 한 줌 흙이 되면 족하지 않은지.
한태주 오카리나 연주 : 지리산
지리산에 살면서 오카리나만 불며 살고 싶다
말은 안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