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무 그늘 아래 노인들이 보이지 않으면 가을이 온 걸 느낀다.
어디든 시원하게 쉴만 한 곳엔 삼삼오오 노인들이 있다. 둥구나무 느티나무 아래 평상이나 밭 언저리의 원두막, 또는 언제 지어졌는지 모를 고풍스런 정자나 면에서 지어준 시멘트 정자 등.
여행길에서 늘 보곤 하는 정겨운 우리 시골의 풍경이다.
그러다가 문득 보면 노인들이 안 보인다.
아, 그럴 때 진한 가을을 느끼곤 한다.
이미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바람이 불고 있다는 걸 깨단한다.
그럴 때의 내 기분도 바람만큼이나 서늘하다. 깊은 침잠의 계절이 다가온다는 것에 공연히 서운하고 조바심 나곤 한다.
여름내내 물놀이하는 아이들로 북적대던 개울에 바람이 서늘해지면 개미 한 마리 없이 텅 비어 있던 공허감에 마음이 쓸쓸해지곤 하던 어릴 적의 기억들이 있었다.
동무들이 하나둘 개울가에서 사라지는 아쉬움과 서운함은 어린 가슴에도 제법 상실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했다.
내게 있어 벌거숭이의 어린시절이 다 끝났음을 절감하는 서러운 성장통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때쯤이면 나도 슬그머니 얇은 옷을 벗고 두꺼운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동리의 노인들이 그늘쉼터에서 사라지고 불현듯 서늘한 바람을 느끼는 어느 날 나는 기분이 스산하고 마음은 서운하고 조급해진다.
지금이 그런 계절이다.




계절은 또다시 작년의 그 가을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매년 되풀이 겪는 일이다.
나무 아래를 걷는다.
늦도록 이어진 더위 때문이리라, 이곳 남녘은 여전히 나뭇잎이 푸르다.
유명한 담양 관방제림.
밑둥 우람한 나무들의 헌걸찬 도열.
노거수들이 으늑한 그늘을 드리우고 줄지어 늘어선, 한 눈으로 보기에도 가슴 시원한 그늘숲이다.
푸조나무가 주종이며 그 외 팽나무 느티나무 벚나무 서어나무 등이 섞여 있다.







날마다 관리를 하는 듯 길은 정갈하게 빗자루질이 되어 있다.
내 맘성에는 낙엽 흩날려 쌓인 길이 훨씬 낭만적이고 운치 있겠구만, 너무도 부지런한 흔적이 되려 서운하다.



































이 길의 끝에는 역시 유명한 메타세쿼이아길이 이어져 있다.
그 길은 전에도 가 본 적이 있기도 하고 또한 다음에 또 와야 할 명분으로 남겨두고 가을을 떠난다.
세상은 어디나 끝이 없는 길.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서정주 <푸르른 날>
박인희 : 끝이 없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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