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악산 인왕산 남산과 함께 한양 도성을 둘러싼 동쪽의 낙산.
낙산을 품고 있는 창신동이다.
도성 밖에 있는 마을이라 불운했을까. 이곳은 왕궁과 가까운데도 오래도록 중앙의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창신동엔 또다른 슬픈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나는 실은 돌과 절벽이 있는 풍경을 보려고 창신동을 갔다.
부연 황사로 가시거리가 그리 좋지는 않은 따스한 날이었다.
대도시 서울 한가운데 이런 것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의 채석장이었다.
여기서 돌을 떠다 한국은행 본점, 옛 서울역, 옛 서울시청, 지금은 철거된 총독부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여전히 수탈의 잔재가 남은 우리들의 아픈 역사.
이 채석장의 전경은 건너편 언덕 위 <카페 낙타>에서 잘 보인다.
낙산의 옛 이름이 낙타산이다. 카페 이름도 특이하고 건물도 독특하다.
그리고 그 아래로 내려오면 또다른 절벽이 있다.
‘창신동절개지’라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때 여기서 화강암을 채석했다고 한다.
특이한 지형이니 그냥 눈요기만 하고 말면 될 것을,
‘절벽’이란 단어가 주는 막막함과 그들에게 수탈당했던 분노가 뒤섞여 좀은 우울했다.
그보다 눈에 더 들어온 것은 아찔한 절벽 꼭대기에도, 절벽 아래에도 가득 들어선 집들이다.
이 넓은 세상에 꼭 저런 곳에.
우리의 터전은 얼마나 약소하고 근천스러운가.
우리의 삶은 얼마나 팍팍한가.
저 꼭대기에 사는 사람들은 불안하지 않을까 하고 올라가 보았다.
멀리서 보는 것과 달리 전혀 불안하지 않다. 하긴 50층 빌딩도 바람이라도 불면 폴싹 넘어갈 것 같지만 막상 들어가 보면 그렇게 안정적일 수 없으니.
그래도 당장이라도 절벽의 한 뭉텅이가 떨어져 내릴 것 같은 조마조마한 기분은 가시지 않는다.
창신동 골목은 봉제산업의 메카이기도 하다.
1960년대 동대문과 청계천 평화시장 등 의류산업의 발달로 이곳 창신동도 가내수공업 수준의 봉제공장이 호황을 누렸다.
예전과는 규모가 줄었지만 지금도 봉제와 미싱 관련 인프라가 서 있다.
좁은 골목골목을 원단을 실은 오토바이들이 연신 드나들고 있었다.
올 들어 가장 따뜻한 날이었다.
가파른 골목과 언덕을 오르내리려니 숨이 차고 땀이 흐른다.
이미 봄은 오래 전에 시작되었지만 아직 매화 송이는 봉오리다.
저 남쪽 매화마을도 축제기간인데 꽃은 아직 없고 매화 상춘객들은 사람구경만 하고 돌아간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담장에 늘어진 영춘화를 보았다.
아 노란 이들이여.
비로소 올봄 처음으로 보는 꽃송이다. 내가 좋아하는 노랑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 담 아래 조붓한 묵정밭에는 제법 파란 풀들이 돋아 있다.
우리가 모르는 시간에도.
잘 날아다니고, 사람을 좋아하고, 가끔 물기도 하고, 박수를 치면 째재재 소리를 내고, 부리에 빨간 털이 있고, 진한 회색 머리색을 가진, 아주 인상착의가 독특한 앵무새를 보셨나요.
단풍아 하고 부르면 달려올거야.
봄이라고 시장에 냉이와 달래 봄동들이 새파랗게 나와 있다.
먹음직스러워 자꾸만 손이 가려 한다.
집이 안 멀었으면 한 봉지 좀 사 넣어도 좋으련만.
성곽이 있고, 봉제가 있고,
육중하지만 슬픈 돌산과 절벽이 있는 마을.
다양한 풍경들을 보유한 창신동 여행.
닐 영 : After The Gold Ru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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