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무료하면 사람들은 문밖을 나가고 싶어 한다.
생각은 있지만 보통 엄두를 못내고 그리워만 하다가 만다.
숲으로 가 봐. 일상의 답답함이 없어도 유혹하는 것이 숲이다.
숲은 만병통치약이다. 순전히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
실은 치료약이라기보다는 더불어 공존하고 상생하는 존재다.
눈이 온다기에 월정사로 갔다.
지난번 보았던 내소사 전나무길 설경이 눈에 선해 월정사는 어떨까 궁금했다.
그만큼의 폭설은 아니지만 겨울만이 보여줄 수 있는 멋진 풍경이었다.
호젓이 걷는 시간이 좋다.
푸른 전나무숲에 하얀 눈이 내렸다.
내가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꼽는 월정사 전나무길.
기분이 좋을 때도 울적할 때도 찾아가 걷고 싶은 이 로망.
두텁게 눈이 내렸다.
고요하다. 나무들도 사람들도 모두 고요하다.
여름에 지천이던 다람쥐도 없다.
30여 년 전, 제가 무슨 수도승인 양 떠돌아 다닐 때, 이름만 들어 알고 있었던 월정사를 난생 처음 갔었다.
홍천 내면에서 두로령을 넘어 진부로 갈 요량이었다. .
두로령에 올랐을 때는 캄캄한 밤이었다.
아침까지 걸을 생각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길이지만 등에 텐트를 지고 있으니 어떤 두려움도 없었다.
두려움은 없어도 거친 길은 만만하지 않았다.
곳곳에서 짐승 소리가 났다. 학계에선 멸종됐다는 여우소리도 들렸다. 승냥이나 늑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좀은 식겁했지만 두려움 없던 시절이었다.
시간관념도 없이 오로지 먼 길에 대한 집심으로만 걷다 보니 멀리 상원사 휘황한 불빛이 보였다.
갑자기 피로가 밀려왔다. 아침까지 걷지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서 두 시간을 더 걸어 길 옆에 텐트를 치고 누웠다. 먼 짐승들의 소리는 밤새 들려왔다.
아침에 눈을 떠 보니 거기가 월정사였다.
그렇게 처음 만난 전나무길.
길에 대한 인식과 개념이 희박했던 시절이라 이 아름다운 전나무 숲길을 지나면서도 그닥 큰 감흥이 없었다.
때는 만추라 오대천의 단풍이 절정이어서 그것만이 길래 남아 있다.
지나간 일은 거개가 아름다운 기억뿐이다.
필요한 것만 기억해 내는 장치가 있어 얼마나 편리한지.
지금은 별로 재미없는 일상 같아도 나중에 돌아보면 또 좋은 시절이었다고 느낄 것이다.
나무 우듬지에서 쏟아지는 눈가루는 정말 장관이다.
카메라로 제대로 담지 못하는 게 아쉽다.
버스 한 대가 서더니 우루루 사람을 쏟아 놓는데 전부다 대포 카메라를 걸고 있다. 사진동호회인 듯하다.
무셔라! 이 구역은 오늘 우리가 접수한다.
사내들이란 잘 모르는 여자, 처음 본 여자, 낯선 여자가 젤 예쁘다는 못된 심뽀를 지녔다
사내들의 즐거운 일 중의 하나가 ‘여자전화번호 따기’다.
물론 젊어 한때의 이야기다.
진즉에 그 즐거움은 포기하고 잊고 산 지도 오래다.
내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걸 보고 두 여인네들이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한다. 무슨 전문작가인 걸로 보였나 보지.
이런저런 포즈로 여러 장을 찍었더니 보내 달라며 전화번호를 찍어준다.
잊고 살았는데 낯선 곳 낯선 시간에 뜬금없이 이루어진 ‘여자전번따기’였다. 아싸~
흰머리 소녀도 여자는 여자니까.
호젓이 걷는 것도 좋지만 둘이, 또는 여럿이 걷는 것도 제각각의 매력이 있으리라.
숲을 나오는 내 뒤로 눈은 자꾸 내리고 있었다.
강수지 : 혼자만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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