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이거나 혹은 자주, 문득 바다가 보고 싶다고 먼 길을 떠나 정말로 바다에 간 적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바닷가에 서서 한 30분만 있으면 그 성취감은 사라지고 만다.
욕구충만의 유통기한은 30분이다. 쾌락의 쳇바퀴가 된 바다는 금세 싫증이 난다.
위압적인 동해바다는 늘 똑같은 모습이다. 나는 변화무쌍한 서해바다를 좋아한다.
동해를 갔다.
역시 문득 바다가 보고 싶었다.
한군데 서서 만끽하는 그 바다는 역시나 유통기한이 짧았다.
그렇다면 걷자. 어디가 될지 다리가 아파 쉬고 싶을 때까지 걸으면 될 일이다.
해변길이든 들판이든, 비린내 나는 포구든.
걷는 길은 지루함이 없다. 늘 새로운 것들이 다가오고 스쳐 지나가고 또 멀어지고.
제법 여러 날을 혹독한 한파가 이어지다 날이 완전히 풀렸다.
햇볕까지 내리쬐면서 더워졌다. 두꺼운 외투 안으로 땀이 흐른다.
꼬마 아이 하나가 반팔차림으로 모래사장을 뛰어다닌다.
바다는 단어로 표현하지 못하게 푸른빛이다.
바람은 잔잔하건만 해변의 파도는 몹시 거칠고 높아 아이를 잡아 쓰러뜨릴 것같이 무섭게 휘몰아오다가 비말 되어 하늘로 솟구치곤 했다.
파도여,
파도여!
일고 일다 부서질
오~,
넌,
하얀
내 그리움.
최영희 <파도>
계절은 여전히 겨울인데 나는 여름이고
내 마음만 봄인 것인지.
어쨌든 먼 길 떠나온 덕분에 나는 동해바다 탁 트인 공간에 한 점 되어 햇살과 파도소리와 더불어 낯선 길을 걸었다.
해파랑길 포항구간이다.
내일은 눈비가 내린다는 예보다.
파고가 높으니 서퍼들은 신이 났다.
이 정경만 보면 정말 여름인 것 같다.
갑자기 여름이 그리워졌다. 올 여름은 또 얼마나 뜨거울까.
죄다 초보 서퍼들인지 꽤나 한참을 서 있는 동안 멋지게 파도를 타는 구경은 하지 못했다.
눈을 뜨니 예보대로 궂은 아침이다 .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침이 꽤나 늦었는데도 하늘과 바다가 어둑신하고 음산하다.
중부지방엔 폭설이 내리고 있다는 뉴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인지.
공간은 온통 짙은 회색이다.
다행히 춥지 않아서 거동하기 불편하지는 않다. 바람도 없어 우산만 쓰면 걷기도 나쁘지 않다.
다만 비를 예상하지 못하고 떠나온 길이라 신고 온 좀 낡은 신발은 금방 빗물이 새어들어 양말과 발이 흥건히 젖었다. 춥지 않아 다행이다.
파고는 여전히 높았다.
어제와 달리 바다에는 사람이 도통 보이지 않았다.
문득 이 광대무변한 공간에 오직 나 혼자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나만 버려진 게 아니고 혼자 우뚝 선 오만함 같은 거였다.
아니면 고고함으로 가장한 외로움일까.
겨울 바다에 가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은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버리고
허무한 불 물이랑 위에
불 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러한 영혼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가보았지.
인고의 물이
수심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김남조 <겨울 바다>
진눈깨비는 온전히 비로 내렸다.
아직은 겨울인데 들판의 논들은 벌써 갈묻이를 해 놓아 촉촉이 내리는 빗물들이 스며들고 있었다.
봄이 바투 다가왔는가. 농사는 이미 시작되었다.
이건 겨울비인지 봄비인지.
여기는 월포역.
강릉과 부산을 오가는 동해선 철도가 개통되어 앞으로 해파랑길 올 때에 요긴하게 이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본 조비 : Alw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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