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릴없이 심심해지자 친구는 남춘천역 옆 카페로 나를 데려갔다.
카페 이름이 <달리는 기차바퀴가 대답하려나>였다.
이름도 참 별나다고 했었는데 김민기의 노래에 나오는 가사인 걸 나중에 알았다.
그때까지 김민기라는 이름은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나 역시 전혀 몰랐었다.
나보다 한 해 먼저 대학에 들어간 그 친구는 대학가에 돌던 주체사상 등 불온문서와
김민기 양병집 등 활동금지된 대중가수들까지 훨씬 많은 문물을 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처음으로 김민기라는 사람을 알았다.
김민기가 족쇄에서 풀린 건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였다.
한국문단 최고의 서정시인인 정지용을 알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가장 감수성이 풍부해야 할 우리들의 청소년기는 그렇게 암울했었다.
김민기는 평생을 두고 단호하게 말했다.
난 민중가수가 아닙니다. 의식 있는 노래를 단 한 곡도 만들거나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저 평범한 언더그라운드 가수일 뿐이라고 했다.
더구나 정권에 대든 적도 없었다.
그의 노래들이 시위현장에서 불렸을 뿐이다.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늘 뒤가 켕기기 마련인 독재정권의 패악질 덕분에 오히려 그는 민중의 스타가 되었다.
그는 민중가수로 남았고 영원히 그럴 것이다.
함열은 김민기의 고향이다.
이곳에 그의 흔적은 하나도 없다.
송해가 전국노래자랑을 그만두었을 때 아 이제 돌아가시겠구나 했더니 얼마 후에 돌아가셨다.
김민기가 필생의 분신인 학전을 폐관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 이제 돌아가시려나하는 생각에 마음이 몹시 무거웠었다.
함열은 옛 흔적이 손톱 끝만큼 남아있는 평범한 농촌마을이다.
김민기의 고향이라는 실오라기 같은 흔적이 없다.
이제 함열에 그의 선양사업을 시작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 같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다는 말처럼
김민기가 서거하고 난 후 그의 행적은 아름다운 사람의 표본이 되어 남은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아, 참 잘 사시다 가셨구나.
참깨를 널어 말리기 시작하면 가을이 멀지 않은 것이다.
하늘은 짜장 가을이다.
여기는 익산교도소세트장이다.
한여름 폭양이 무자비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하늘은 높고 들판은 검푸르게 익어 간다.
거치른 들판이 아닌 푸근하고 풍성한 저 들판.
하늘을 보니 가을이 멀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영동에 사는 문우가 포도농사를 하고 있어 해마다 봄철이면 여럿이 몰려가서 하루 일을 거들어주곤 한다.
오래전부터 이어 오던 농활인데 일은 핑계고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 보며 안부도 묻고 회포 푸는 게 목적이고
그보다는 막걸리판 차려 놓고 옛 추억들을 끄집어내는 게 더 큰 즐거움이다.
새로울 것도 없는 매번 똑같은 이야기들을.
막걸리와 더불어 기타 두드리며 어김없이 싱어롱이 이어진다.
한참 술과 노래에 취해 놀다가는 필경 <아침이슬>을 부르게 된다.
이 노래는 왜 그리 비장한지 모르겠다.
목청껏 노래하면서 죄다 눈물이 그렁그렁하고 만다. 나는 목소리가 안 나와 그냥 대문 밖 어둠만 바라보기 일쑤다.
아, 큰 사람 김민기.
<아침이슬> 하나만으로도 김민기는 우리에게 위대한 유산을 남겨준 영웅이다.
잘 가세요.
우리들의 청년기는 불우했지만 당신이 있어 위로가 되었습니다.
혼탁하고 암울하기만 할 뻔한 세상을 정화시킨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대.
김민기 :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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