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골목투어 삼척] 정라진 나릿골

설리숲 2024. 9. 7. 12:53

 

삼척항에서 올려다보이는 언덕빼기마을, <나릿골> 이야기를 전에 들은 적이 있어 한번 가보려고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실은 그간에도 갈 생각은 몇 번 했었지만 워낙 폭염이라 길을 걷기가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자칫 길바닥에서 쓰러질 수도 있는 세월이라.

길을 좋아하는 사람이 길에서 죽는 게 영광이라고 말은 번지르르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죽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더구나 노인 하나 온열질환으로 쓰러졌다는 뉴스는 아무래도 모양이 빠집니다.

 

 

폭염도 좀 누그러졌습니다.

이번 정기도보 답사를 떠나면서 강원도 가는 김에 그곳엘 들르려고 우정 행장을 차렸어요.

그치만 같은 강원도 지역이라도 삼척과 고성은 엄청 멀어요.

뉴욕을 가는 딸내미한테 미국 간 김에 엘에이에 있는 이모한테도 들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침부터 내리는 부슬비는 하루 종일 오락가락 지짐거립니다.

정라진과 그 바다는 회색빛이었고 김민기의 노랫말처럼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인지 수평선이 흐릿합니다.

 

바로 앞 눈 닿는 언덕빼기에 마을이 보입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정라동 달동네.

구차한 마을 이미지를 희석하고자 리모델링을 하면서 나릿골이란 이름으로 홍보하고 있는 감성골목입니다.

 

 

 

 

 

마을의 집은 죄다 주황색으로 도색했습니다.

여행객에게는 이색적이어서 보기 좋지만 이런 건 마치 전체주의 사회 같습니다.

민들의 의견과 개성은 무시하고 일방으로 획일화시킨 주황색의 불편함.

 

일전에 보라섬으로 유명한 신안의 박지도와 반월도에서도 느낀 기분이었습니다.

집과 길바닥 배 사람 쓰레기통, 보이는 것마다 보라색으로 뒤발한 데다 심지어는 농작물까지도 콜라비를 강요한 듯한 인상에 그닥 유쾌하지만은 않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폭우가 쏟아져도 산이 무너지면 무너졌지 마을이 잠길 일은 도저히 없어 보이는 가파른 골목들.

좁은 골목들을 이리저리 걷다 보면 아까 왔던 곳이기 일쑤인 미로 같은 길.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같아서 손바닥만 한 땅뙈기만 보이면 고추니 가지니 바특하게 심어져 있고 담장에는 어김없이 호박덩어리가 올라앉아 있습니다.

 

 

 

 

 

남편과 아버지는 바다로 내보내고 아낙들은 부두에 나가 역시 갯일을 하고 아들놈은 도시락 달그락거리며 아침에 내려갔던 가파른 골목길로 돌아오는 고달픈 세월이 있었을 테죠.

그 아들놈이 자라 그 아비가 죽은 바다로 다시 나가며 또 한 세대를 살았겠죠. 여전히 누군가는 그 대물림을 하고 있을 언덕빼기 바다.

 

무시로 바다는  모질게 이 언덕에 몰아쳐 헤집어 놓고 가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 바람에 기대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다와 바람은 웬수면서 나를 지탱해 주는 이율배반적인 숙명입니다.

 

그보다 많은 사람들은 나름의 꿈을 찾아 언덕을 내려가 다시는 이곳을 오지 않으리라는 집심으로 어디선가들 어깨에 또다른 무게를 얹고 있을 테죠.

 

 

 뒷간을 이곳 말로 ]정라'라 하는데 정라진이라는 이름하고는 연관이 없습니다.

 

 

이곳은 늘 적막합니다.

적막도 이 골목의 숙명일지도 모릅니다.

 

그나마 나 같은 뜨내기 관광객들이 더러더러 골목길들을 기웃거리며 적막을 흐트러트리니 이곳 사람들은 반가울지 귀찮을지 그 내심은 모르겠습니다.

 

아무려나 너무 유명해져서 밤낮으로 골목길이 왁자지껄 관광객들의 물결로 가득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항구로 내려오니 비가 좀 누꿈해집니다.

바다를 안고 새천년해안도로를 걸을 참입니다.

이 길은 해파랑길 32코스의 일부분입니다. 폭염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했던 길인데 더위도 한풀 꺾이고 마침 보슬비도 내리니 걷기에 제법 쾌적합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돌아보면 연례행사처럼 해마다 한번씩 동해로 나와 해파랑길 한 구간씩 걷는 패턴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10개 코스를 걸었으니 총 50코스인 이 길을 다 걸으려면 40년을 더 살아야 합니다.

 

나릿골 언덕을 떠난 이들이 다시 그 언덕으로 돌아오지 않으려 입을 감쳐물고 악착같이 사는 것처럼 하면야 그까짓 40년 못살까 보냐 하며 혼자 웃습니다.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렇게까지 악착스러울 정도로 가성비가 좋은 버킷리스트는 아닙니다.

 

 

조각공원의 바이올린 소녀를 적시고 맺힌 빗물이 꼭 눈물을 흘리는 것 같습니다.

 

 

보슬비도 그치면서 저녁답에는 하늘이 벗갭니다.

이미 날이 이울어 벌겋게 노을이 비끼는 저녁입니다.

 

 

이내 어스름이 내리고 순식간에 길도 바다도 어두워졌습니다.

 

아름다운 하루가 지나갑니다.

오늘 같은 내일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Opus III : It's A Fine 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