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코스는 두어 해 전 추석에 다녀왔으므로 이번엔 45코스를 걷기로 했다.
그 많은 해파랑길 구간 중에서 45코스를 선택한 건 이렇게 싱거운 거였다.
장사항에서 설악항까지.
이 구간은 호젓한 바다풍광을 즐기며 걷는 구간은 아니다.
항구와 해수욕장들로 이어져 있어서 관광 인파가 북적거리는 휴양지가 대부분이다.
낮보다는 밤이 더 피어나는 유흥가의 구간이다.
이 구간의 알짬은 아무래도 영랑호수 둘레길이다.
처음 걸어본 영랑호.
가을이 짙어지는 호수의 오후가 고즈넉하니 좋다. 8km나 되는 제법 먼 길이다.
어스름 저녁이 내리고 있는 잔잔한 호수.
설악 능선 뒤로 넘어가는 석양이 호수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꼭 영랑호라서 아닌, 가을의 여행은 어디든 좋다.
그리고 영랑호에서의 가을 저녁은 더욱 행운이었다는 자평이다.
이윽고 바다엔 어둠이 가득 차고,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낮보더 더 활활 타오르는 해변의 밤,
밤거리.
시나브로 밤이 깊어 갔다.
모처럼 아침 일찍 부지런을 떨어 동명항의 일출을 본다.
항구는 그런 나보다도 더 먼저 깨어 휘황하게 불을 밝히고 수런거렸다.
동트는 바다.
생애 처음으로 완벽한 오메가 ῼ 형태의 일출을 접했다.
내 생애 큰 의미가 되는 대단한 아침이었다.
세상은 얼마나 고상하고 위대한가.
넋 놓고 바다를 바라보다 이윽고 길을 떠났다.
아침 먹는 것도 잊었더니 시장하다. 아바이마을의 오징어순대가 눈에 들어온다.
여행은,
걸뱅이 같이 걸어도 먹는 것은 호화롭게 먹을 일이다. 내 지론이다.
비싼 걸 먹자는 게 아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먹고 싶은 걸 먹자. 그게 좀 비싸더라도.
45구간의 종점은 설악항이지만 나는 좀더 지나 물치항까지 갔다.
이제하의 소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의 배경인 곳이다.
그러나 지금의 물치항은 소설 속에서의 레트로 정취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당연하다. 소설이 쓰여진 게 50년 전이다.
사람의 문화와 풍토는 변하거나 사라졌어도 여전히 바다와 파도, 그리고 모래톱과 갈매기들은 여전하니 자연의 영속성은 나그네를 오래 전 그때를 회상하게 하면서 따뜻한 위안을 주는 것이다.
추석이었다.
명절은 가족과 함께가 아니라 자유롭고 고독하게.
제사와 차례를 없애니 자유와 고독 그것들이 고스란히 내 차지가 되었다.
가을, 그리고 명절 연휴가 내게 주는 고귀한 선물.
그래, 멀리 떠나자
그리움을 만나 보자.
어쩔 수 없이
이제는 돌아오기 위한 여행을 하기로 한다.
자,
출발!!
어떤날 :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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