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선림사에서 다시 길을 시작하려 한다

설리숲 2023. 4. 20. 23:24

젊어 한때 방황을 했다.

그 방황이란 게 내게만 있었던 특별한 것도 아니다. 누구나 질풍노도라는 이해불가한 시기의 강을 건넜을 테고 스스로 심각했다고 생각하는 나의 방황도 그런 수준의 것 이상은 아닌 치기에 불과했다.

 

젊은 시절엔 근본 없는 번민에 괴로워하고 쓸데없이 고민하고 스스로 고뇌거리를 찾았던 셈이다, 돌아보면 그것이 멋인 줄 알았고 남 보기에 깊은 성찰을 하는 철학자 따위로 보일 것으로 착각하는 소아적인 치기였다.

 

오히려 나이 먹은 지금은 고민도 없고 걱정은 더 없으며 우선은 깊이 사고하는 것 따위가 귀찮아 죽겠다. 늙으면 아이가 된다더니 마인드는 과연 순진무구해지는 것 같다.

 

 

 

그 고뇌하는 척 했던 시기에 나는 절과 암자를 찾아 돌아다녔다.

정찬주의 <길이 끝나는 곳에 암자가 있다> 포켓판 책을 주머니에 넣고 책에 나오는 암자들을 찾아다녔다. 딴엔 무슨 순례자처럼 맘으로 거들먹거렸으나 나중에 돌아보았을 때는 그저 할 일 없는 백수의 시간 죽이기 이상은 아니었다.

 

 

출가를 생각해 본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러나 출가는 내게 언감생심이었다. 내가 원한 건 오로지 자유와 고독이었다. 산속으로 들어간다고 자유롭거나 고독해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틀에 박힌 조직생활에 계율과 수행을 해야 하는 생활은 게으르고 경박한 내가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고도의 경지였다. 솔직하게는 구속과 지루함의 반복이 눈에 선했다.

그러루해서 난 생각뿐인 출가를 했다가 과감하게 환속을 단행해 버렸다.

 

 

<길이 끝나는 곳에 암자가 있다>에는 없지만 언젠가 작가 정찬주 선생이 잠깐 언급한 선림사라는 이름이 이유도 모르게 오랫동안 머리에 저장이 돼 있었다.

뜬금없이 그 절을 가 보고 싶었다.

 

문득,

이제는 젊은 날의 치기 어린 시간 죽이기가 아닌, 정말로 나를 찾아 떠나는 순례를 시작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애처럼 점점 순진무구해지는 이런 상념이라면 고뇌와 번민 없는 즐거운 산사 여행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선림사는 보령 오천면에 있다.

봄빛의 절정이다.

선림사로 오르는 길엔 겨울의 나목들이 한창 푸른 잎을 내밀고들 있었다.

벚꽃 잎마저도 지고 나면 거침없이 녹음이 무성해질 것이다.

선림사는 마곡사의 말사로 암자는 아니다. 암자 특유의 적요함은 없고 오히려 누리 가득 쏟아져 내리는 봄 햇살로 많은 것을 소유한 풍요함 같은 첫인상이었다.

 

 

 

 

 

 

 

철이 철인지라 경내에 온갖 봄꽃들이 지천이다.

특히 구석구석 눈 닿는 곳마다 덜퍽진 건 노란 수선화다.

 

, 수선화! 나르시스!

스스로의 미모에 반해, 속된 요즘 말로 하면 자뻑으로 불운하게 죽은 미소년.

원빈이 떠오른다.

 

 

출가를 생각하던 그때 나는 내 법명까지도 생각해 두었었다. 물론 불가의 법명은 수계를 하고 은사 스님이 지어주는 거지만 나는 갖고 싶은 이름이 있었다.

그게 원빈이었다. 물론 배우 원빈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이었다. 나중에 나르시스 같은 꽃미남 원빈이 그 외모로 세상을 지배하게 되자 나는 원빈이란 이름에 더욱 애착이 갔다.

 환속한 자의 자기위로랄까. 나는 환속하기 전에 원빈이었다!

 

아마 내가 원빈이란 법명으로 어느 절간에 있다면 날마다 우바이 청신녀들로 절이 미어터졌을 것이다. 이름도 그렇고 더구나 빼어난 미모의 승려라...

사찰이 돈은 벌겠지만 참으로 민폐가 아닐 수 없다. 내가 환속하길 잘했다.

 

 

 

 

 

 

 

 

 

 

 

 

 

 

 

 

 

 

 

절 안내문에 의하면 산신각의 저 기둥이 싸리나무라는데 의문스럽다.

저리 굵은 싸리나무가 어딨어? 사실이라면 정말 인류문황유산급의 귀한 건축물이고.

 

 

 

봄 햇살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환한 도량에 수선화 노란빛이 더해 화광의 정원이다.

 

 

 

 

 

선림사에서 10분 정도 걸어 내려오면 도미부인 사당이 있다.

아랑과 더불어 정절의 상징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실존인물인지 알 수는 없지만 삼국사기에 나오는 사람이다.

 

이 옥녀봉이 도미부인의 전설이 깃든 산이라고 보령시에서 프랜차이즈 인물로 선정했다는데 정확한 근거는 없다. 각종 문헌을 참고하면 보령보다는 경기도 하남과 서울 송파가 더 도미부인과 관련이 있다는 말도 들었다.

 

어쨌든 정절사라는 사당과 그 옆에 봉분 큰 묘까지 만들어 놓았으니 도미부인을 다른 도시에 빼앗길 수 없다는 보령의 결연한 의지가 보인다.

 

 

 

그런데 부인의 이름은 없다. 없는 건지 알지 못하는 건지. 

도미의 부인으로만 알고 있다. 위인은 부인인데 사람들은 남편인 도미 이름만 알고 있으니 섭섭하기로는 퀴리 부인도 그럴 테다.

 

어쨌든 오천항 근처에 도미항이 있고 그 앞의 섬 빙도가 전엔 도미섬이었다고 한다.(아래)

 

 

 

 

짧고 강렬한 봄이 지나가고 있었다.

강렬했던 내 청춘도 그만큼 더 멀어졌다.

 

 

 

 

 

 

 

 

'서늘한 숲 > 햇빛 속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미산 병풍암에 두고 오다  (1) 2023.05.17
한국 속의 유럽 매미성  (0) 2023.05.15
새만금, 모진 비바람 속을 걷다  (0) 2023.04.13
보령 천북폐목장  (0) 2023.04.11
증도, 해가 뜨지 않는 섬  (1) 2023.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