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절정에서 이울고 있었다.
봄이 늦은 산골 마을의 조붓한 밭들도 한 해 농사를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병풍암은 마을이 끝나는 곳에서 이 조붓한 밭들 사이 경운기 하나 다닐만한 좁은 시멘트 길을 지나간다.
입구에 차단 바리케이드를 질러 놓았다.
남자 둘이 한담하며 서 있기에 못 들어가게 통제하는 건가 해서 조심스레 물었더니 어디 가시느냐고 한다.
요 위에 암자요, 했더니 가시란다. 출입금지가 목적이 아니라 외지인들의 무분별한 차량통행 때문에 막아 놓았다고 한다.
밭들을 지나면 거짓말처럼 속세가 끝나고 오지다. 전봇대와 함께 전깃줄이 여기에서 끝났다.
오던 길을 뒤 돌아보니 저 멀리 느티나무가 보인다. 밑에서 보았을 땐 사뭇 위엄있게 우람한 숲을 드리우고 섰더니 위에서 내려다보는 나무는 별 것 아니다.
사바가 발 아래다.
우리 자신들은 모르는 채 속세에서 복대기며 살지만 한 걸음 나가 밖에서 들여다보는 세상은 보잘것없고 가소로우니,
아웃사이더가 되고 싶은 나의 로망은 언제나 유효함을 확인하곤 한다.
밭들이 끝나는 곳에서 병풍암은 지척이지만 완벽하게 속세와 단절돼 있다.
봄이 이울어 가며 여기저기 산벚나무들이 그제야 환한 봄을 즐기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숲속에 가려진 병풍암이 보였다.
암자라기보다는 토굴이다. 겉보매는 산속에 거칠게 살고 있는 자연인의 집이다.
나도 한때는 토굴 짓고 철저하게 세상과 단절하고 사는 것을 동경했었다.
나와 같은 또라이 기질이 있는 부류 사람들의 공통된 로망이었다.
정선의 숲에 들어가 13년을 그렇게 살았다. 아니 그렇게 살고 싶었는데 세상과 완전히 단절하는 데는 실패했다. 말이 야인생활이지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하고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착각이었다.
돌아보면 자기만족이요 자기도취였다.
병풍암엔 스님과 보살님이 있다고 듣고 있었다. 들어가니 스님은 바구니를 앞에 놓고 쪼그려앉아 뭔가를 하고 있다. 인기척을 내고 그냥 구경만 하고 잠깐 있다가 돌아가겠다고 민폐 안 끼치겠다고 하니 대답은 없고 고개만 주억거린다.
흙벽의 오두막이 정겹다. 나의 정선 생활과 다를 게 없다. 이 사람은 법복만 입었지 나와 다를 게 없었다. 수행하는 스님이 아니라 단지 고독하고 자유롭게 살기를 갈망하는 아웃사이더인 것 같다. 다만 나와 다른 건 저 토굴 안에 부처를 모셨다는 것일 것이다.
그래도 나보다 부자다. 비록 동퇴서비 허술하지만 본채 말고도 창고도 있고 별채도 있고 뒷간도 있고 이것저것 도합 일곱 동이나 소유했다. 달랑 오두막 하나에 뒷간 하나였던 나보다는 참 많은 것을 소유했다.
이런 것들을 둘러보는 동안 내내 스님의 경계하는 토심이 느껴졌다. 한번도 내게 눈길을 주지 않고 자기 일만 하는 듯 보였지만 내게 그 공기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등산객도 아닌 웬 낯선 이가 뜬금없이 구경하겠다고 내 집을 휘적거리는데 경계심이 없을 리가 없다. 스님도 불편하고 나도 불편하다.
잠시 등산로로 발을 옮긴다.
군위 아미산은 이 지역 산꾼들이 좋아하는 등산 여행지 중의 하나다. 산행코스는 반드시 이 병풍암을 지나간다.
일 년 내내 등산객들이 지나가고 때로는 집터 안에서 쉬고 떠들다 가곤 할테니 영역을 침법당한 수행자는 여간 귀찮은 게 아닐 테다.
내 오두막이 있던 정선 그 숲은 나물이 지천이었다. 온갖 봄나물이 나오는 5월이면 멀리서 외지인들이 들어오곤 했다. 그들은 내 마당에다 차를 세우고 숲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게 무척 싫었다. 자연인의 최소한의 영역이 침해당한 기분은 그랬다. 그렇다고 한번도 싫은 기색을 내 보진 않았다.
저녁 무렵에 그들은 나물로 가득한 커다란 마대자루 두세 개씩 이고 지고 내려오곤 했다. 봄철은 내게 다른 의미에서 잔인한 계절이었다.
정선에 와서 원빈을 만났다.
어느 날 읍에 나갔다가 돌아오는데 면사무소 마당에 사람들이 모여 있고 제법 떠들썩했다. 뭐야, 먼발치로 보고 있자니 이런 세상에! 원빈이었다.
뒤늦게 알았지만 이곳 여량면이 원빈의 고향이었다. 배우로 크게 성공을 하고는 고향 사람들에게 인사를 온 것이었다. 얼굴도 잘 생긴 놈이 인성도 좋았다.
나는 그 전에 출가한다면 원빈이라는 법명을 가지리라 작정했던 이력이 있었다.
이것이 억지로나마 그와 나의 인연을 이어붙이고 싶은 유치함이 생긴 동기가 되었다.
다들 알다시피 원빈은 고향 정선의 보리밭에서 이나영과 스몰웨딩식을 올렸다.
등산로를 잠깐 거닐다 이제 내려갈 요량으로 토굴로 다시 내려오니 스님은 보이지 않는다.
아까 뒤적거리고 있던 바구니를 들여다보니 다래순이다. 나도 정선 숲에서 묻혀 먹곤 했었다. 비로소 계절이 봄철임이 실감났다.
자꾸만 옛 기억이 떠올려지며 아련히 그리워졌다. 아련하다고 하지만 그리 오래전도 아니다.
그립지만 다시 숲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 같다.
그대신 나는 예전에 어설프게 흉내만 내다가 만 순례길을 다시 떠나려고 한다. 그때는 자기 멋에 도취된 객기였지만 이젠 아무런 감정 없이 순수하게 길을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병풍암을 등지고 나오는데 자꾸만 뒤가 묵지근했다. 스님의 불편한 시선과 토심이 고스란히 내 뒤꼭지로 전달되는 듯한 무게였다.
아마도 어느 구석에서 내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리라는 짐작도 하였다.
비바람에 이아쳐 드러누운 이 안내판이 아니라면 암자는 커녕 어느 사회부적응자가 속세를 등지고 사는 토방으로 밖에 생각 안할 것이다.
그사이 저녁이 다 되고 해가 뉘엿거리고 있었다. 산그늘이 내려와 누우려 하고 있었다.
스님은 지금쯤 방에 모셔진 부처를 알현하고 염불을 하고 있을까.
계공다소 양피래처 촌기덕행 전결응공
다래순을 데치며 게송을 흥얼거리고 있을까.
깊은 산골은 아직은 저녁이면 쌀쌀하니 아궁이에 불도 때야 할 것이고.
나는 숲에서 나오길 잘했다고 자신을 다독이곤 한다. 그들에겐 늘 부처가 함께 하고 있으니 자유롭지도 않고 고독하지도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조르주 무스타키의 노래 <나의 고독>에서 답과 위안을 얻는다.
Non, je ne suis jamais seul avec ma solitude.
고독이 함께 있으니 나는 외롭지 않아.
산벚꽃 흐드러진 숲정이에서 둥지에 들려는 직박구리들 소리거 요란하게 골짜기를 채운다.
저들에게도 따뜻한 가정이 있을까. 저녁이 있는 삶을 꿈꿀까.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정호승 <수선화>에서 발췌
김종찬 : 산다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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