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새만금, 모진 비바람 속을 걷다

설리숲 2023. 4. 13. 18:24

 

아직 세상이 깊은 어둠에 빠져 있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몽롱한 머리를 하고 아침을 먹는다.

어릴 적 장에 나가는 아부지가 새벽조반을 먹는 소리를 잠결에 듣곤 했는데 그 새벽 아부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설렜을까 삶의 무게에 힘겨웠을까.

 

 

칠흑 같은 어둠을 찢고 달린 버스는 바다 한가운데 우리를 배출한다.

바다인 건 알지만 보이는 모든 것이 어둠이라 실감은 나지 않는다.

새만금이다.

몹시 바람이 불고 버스가 토해내자 마자 후두둑 빗방울이 듣기 시작한다. 이룡일 비 내린다는 예보는 이미 접했으니 다소 오긴 하겠지.

 

 

 

 

 

첫 발걸음을 떼면서부터 빗방울이 굵어진다. 사위가 어두우니 바람소리는 유난히 위협적이다.

저만치 고기잡이배 몇 척의 불빛이 이곳이 바다임을 알려준다.

우리는 청승이라 신새벽 비바람 속으로 들어왔지만 저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부지런을 떨어 이 어둠 속에 들었을까. 아님 취미로 고기를 낚으러 온 배일까.

 

 

 

 

 

 

 

 

무념무상,

새만금 긴 둑엔 거칠 것 없이 비바람이 몰아치고 이미 신발과 양말은 철벅철벅이다. 기온은 뚝 떨어져 손도 시리다.

오직 할 수 있는 건 걷는 것뿐이어라.

앞에 놓인 건 길이니 그냥 걸어 갈뿐 왜 걷는지 의문도 부질없다.

어서 이 길을 끝내고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자.

 

새벽을 벗어나 아침도 오전도 이미 이슥해 정오가 가까웠건만 세상은 여전히 어둡다. 햇빛 없고 온통 안개.

안개 자욱한 이런 날은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워낙 센 바람이 휘몰아대니 카메라가 흔들려 초점이 안 잡힌다.

사람의 형상도 안개같이 흐릿하게 찍혔다.

 

 

 

이놈의 사진이 뭐라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알 수 없는 사명감에 젖어 카메라를 꺼내고 집어넣고를 반복한다.

포탄이 쏟아지는 전장에서도 사명감 하나로 사진을 찍어야 하는 종군기자처럼 나는 비바람 속에서 일종의 사투를 벌인다. 나는 비를 맞을지언정 카메라는 젖으면 안된다. 지켜야 한다. 이놈의 모진 비바람.

비만 오면 좋을 걸, 아니면 바람만 불어도 좋을 걸. 비바람은 영 곱지가 않다.

 

 
 

 

 

 

 

 

 

가도 가도 똑같은 픙경,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지루한 길. 새만금.

바다는 내내 부옇게 연무 속에 잠겼고 그 너머 어디선가 내내 바람이 몰려 왔다.

 

 

 

 

그런데 실은 이런 악천후의 사진이 더 좋다.

비 내리는 풍경, 무더운 여름 뙤약볕 아래의 서정, 눈보라 몰아치는 겨울날의 광경들이 더 멋지고 아름다운 것이다.

비록 초점이 안 맞어 선명하진 못해도 비바람 몰아치는 대자연 속의 사람들 모습은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가.

어둠 속에도, 안개 속 어딘가에도 지금 길을 걷고 있을 그 어떤 이들에게 나는 깊은 감명을 받는다. 어딘가에 있을 그에게 힘찬 응원을 보낸다.

 

 

 

 

실은 어릴 적, 이른 아침 안개에 묻힌 가로수나 전봇대를 보면 어디론가 무작정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길 여러 번이었다.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먼 길을.

이번 새만금 바닷길에서 이 옛 몽상이 다시금 되새겨졌다.

색다른 경험이었다.

이번에도 나는 먼 길을 떠나지 못하고 또다시 컴백홈했다.

 

이제 또 비바람 속을 걷는 날이 있을까, 안개 속에서.

 

 

 

 

 

   크리스 디 버그 : The Road To Free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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