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증도, 해가 뜨지 않는 섬

설리숲 2023. 4. 7. 23:18

 

참 멀고 먼 땅.

가지 않은 길에 미련이 남는 법이지만 막상 그 길을 갔다면 그닥 새로울 것도 없고 역시나 평범한 길임을 깨달을 테지.

오래전부터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섬 증도.

작은 기다림 끝에 드디어 발 디디다.

 

 

여기도 역시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특별히 판타스틱할 것도 없고 경탄스러울 것도 없고.

여느 갯가마을 어디에서나 보는 흔한 풍광 그대로다.

그렇다고 실망했던 건 아니다. 미지의 세계, 즉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이었다.

 
 

 

 

 

 

 

 

 

 

 

바다는 청량하고 해변은 드넓었다.

우전해수욕장은 그 길이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다고 한다.

 

인적도 드문 이 섬과 바다는 그래서 내가 멍때리고 소요하기에 최적의 섬이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이상향 같은 곳이었다.

 

 

 

 

 

 

 

 

 

 

 

 

 

 

 

 

 

 

 

이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함초빵

안에 든 초록색 소가 함초다.

 

 

 

 

 

아침놀과 저녁놀을 보려고 섬 남쪽 곶에 있는 펜션을 예약했다.

그러나 내가 머무는 동안 날씨는 내내 짙은 회색빛으로 흐려 있었다. 노을은 고사하고 단 한번도 햇빛이 내려오지 않았다.

펜션의 뷰는 최고였다. 다만 창밖은 무채색이었다. 내가 머무는 사흘 동안 내내 그랬다.

 

 

 

펜션에서 바로 앞에 보이는 섬은 까치섬이다. 썰물에 길이 드러나면서 섬으로 건너갈 수 있다.

섬에서 바라본 숙소.

바닷물이 빠지자 드러난 해변. 머리가 정갈해지도록 깨끗하고 청량한 풍광이었다. 하루에 반만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모래해변이다.

 

 

 

 

 

 

 

 

 

전에 정선 숲에 살 적에,

비어 있던 옆 폐가에 부부가 이사를 왔었다.

십 몇 년을 신안의 염전에 있다가 이젠 힘들고 지쳐 산으로 왔다고 했다.

나이가 나보다 그리 많은 것도 아닌데 겉늙어 보이는 데다 굴왕신 같은 매골이어서 환갑도 더 지나 보였다.

얼굴은 새카만데다 버석거리는 피부. 한눈에도 고생에 찌든 인생이 보였다.

 

일년 정도 그 폐가에 살다가 큰골로 집을 얻어 갔는데 그 이후로는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그 아저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깝게 지내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마음이 안좋았다. 한 가련한 인생을 떠나보낸 것 같은 허허로움이었다.

내 생도 그보다 나을 것도 없으면서.

 

 

 

 

 

 

그의 고단한 인생을 만든 건 염전이었다고 나는 근거 없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만큼 염전 일은 고된 일이다.

직업은 귀천이 없다지만 노동의 강도로 따지자면 염전 일은 천한 일이란 걸 부정할 수 없다.

그 후로 여행길에서 언뜻언뜻 염전 근처를 지날 때면 착하기만 했던 그 아저씨의 새카만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누가 노동을 아름답다 했는가, 신성하다 했는가.

 

 

 

 

그 아저씨가 있었던 곳이 필경 여기일 것이다. 증도에 염전은 이곳 밖에 없으니까.

약140만 평 되는, 국내에서 가장 방대한 단일염전이라 한다. 증도 땅 전체의 4분지 1이나 되는 염전이다.

 

 

 

 

 

 

 

늘 그렇듯이 저 먼 바다로부터 불어와 개펄을 지난 바람은 오늘도 여지없이 그렇게 왔다가 가곤 한다.

사람의 인생 역시 그같이 반복되는 것임을.

죽어야 끝나는 이 고통, 환멸.

죽어도 소멸되지 않는 무거운 업장들.

머리카락이 죄다 뽑힐 듯한 뜨거운 태양열을 하루 종일 맞으면서 덥다는 말조차도 하지 않는 무뎌짐. 체념? 혹은 달관?

 

 

 

 

 

지금은 그나마 노동조건이 나아진 편이다.

사람이 올라서서 다람쥐처럼 돌려대던 수차 대신 동력으로 컨베이어를 돌린다.

두렁마다 창고로 이동할 수 있는 레일을 깔았다.어깨를 짓누르는 고통으로 소금을 나르던 강고는 사라지고 레일 따라 카트를 운행한다.

그렇지만 소파 대파 똘비 다대기 염부삽 등 염전 사람들의 노동을 필요로 하는 기구들은 여전히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기계화가 가장 더딘 곳이 염전이다.

 

 

 

 

 

 

 

 

 

 

 

 

 

  머무는 것이

  이별의 시작이며,

  집착이

  자신을 묶는 것임을

  알듯도 싶은데

 

  풀끝을 스쳐 지나

  나뭇가지에 미련 두지 않으며

  꽃봉오리에 머물지 않고

  훌훌 떠나는 까닭을

  알듯 싶은데

 

  마음먹은 대로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바람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날마다 걸어가는

  내 생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고재복 <바람 앞에서>

 

 

 

짧은 겨울이 끝나고 염전에도 봄이 왔다.

다시 고단한 한세월을 나기 위해 소금밭을 점검하기 시작하는 사람들.

때가 되면 이들 말고도 전국 각지에서 외로운 사람들이 또 모여들 것이다.

하루종일 햇살 줄기 없이 무겁게 내려앉은 날이었다.

쌀쌀한 바람이 쉴 새 없이 빈 들판을 쑤석이며 지나갔다.

 

나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토착민인지 아니면 잠시 여행지를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인지.

이웃에 살았던 그 아저씨의 땀과 한숨이 짙게 배어 있을 이 개펄에서.

 

 

 

 

내가 이 섬을 떠날 때까지 끝내 해는 한번도 뜨지 않았다.아니지,해야 매일 떴겠지만 한번도 바다에도 내 머리에도 햇살을 비추지 않았다.

서해의 붉은 노을을 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지만 그것 말고는 고요하고 아늑한 이상향 섬,

아름다운 증도다.

 

 

 

 

 

 

                앙드레 가뇽 : 저녁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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