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한국의 아름다운 길

바람 속을 걸어가... 양구 펀치 보울

설리숲 2022. 2. 8. 22:39

 

입춘 날이었습니다.

봄은 아직 저 멀리 있고 한창 깊은 겨울 속에 들어 있는 저 북쪽 땅

양구 해안,

거기다 해발 500미터의 고분지, 펀치 보울입니다.

 

해안면에서 군복무를 했다는 예전 회사동료는 춥고 고생했던 이야기만 늘어놓아서 내게는 아주 몹쓸 전방 황무지 땅이라는 이미지만 잔뜩 박여 있었습니다.

그 친구도 그곳이 펀치 보울이라고 불리는 걸 몰랐던 모양입니다.

 

 

 

 

 

 

 

 

 

 

열이면 열 다 펀치볼이라 하는데 펀치 보울(punch bowl)’이라 해야 맞는 표기입니다. 우리 말로 하자면 화채그릇이란 말인데 제 눈으론 먼 옛날 아주 거대한 운석이 쿵, 하고 쩔어져 움푹 패인 것 같은 지형입니다.

 

 

같은 나라 땅이면서 멀게만 여겨지던 펀치 보울을 우정 작심하여 허위허위 올랐습니다.

군장병들 즐비한 동토의 황무지? 터무니없는 선입견이었어요.

여기도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는 곳입니다. 여기저기 군부대 간판은 여럿 보았지만 군인 하나 만나지 못한 여행이었습니다. 지뢰 경고 팻말만 아니라면 그저 신기하고 이국적인 관광지입니다.

군인은 인제 서화리의 메가커피에서 딱 한 사람 보았습니다.

 

 

 

 

추위는 별거 아닌데 웬놈의 바람이 그리 거세게 부는지 정신을 못차릴 정도였습니다. 원래가 바람 많은 고장인지 그날만 그랬는지 아무튼.

영하 18도라도 마을들이 있는 보울 바닥 지역은 따뜻하고 아늑하더니 산록면 자드락에 오르니 그리도 강풍이 몰아치는 겁니다.

 

귀도 시리고 코도 시리고 눈물도 나고.

마스크를 올려 쓰니 코는 따뜻한데 입김이 안경을 덮어 버리면서 금세 허옇게 얼어 시야를 가립니다.

 

펀치보을 둘레길은 약 70km라고 합니다.

당연히 다 걸을 생각은 않았고 적당히 걷다가 해전치기로 내려올 요량이었습니다.

 

 

 

 

 

눈이 내리고 여러 날이 지났건만 아무도 지나간 흔적 없는 숫눈길을 걷습니다.

평길보다 체력이 많이 소진됩니다.

당초에는 해동갑으로 마칠 생각으로 올랐던 건데 눈길 걷기가 만만치가 않습니다.

바람만 아니라면 그래도 나을 걸 세찬 바람은 간단없이 휘몰아대며 자드락 곳곳에 부옇게 눈바람을 일으키곤 합니다. 일견 영화 같은 멋진 장면이지만 내 코와 귀가 얼어 버적거리는 데야 멋진 풍경으로 감상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어느덧 입춘이라 해가 길어져 해 떨어질 때까지의 여정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그대로 마을로 터벅터벅 내려왔습니다.

 

 

 

 

 

 

수박겉핥기나마 그래도 펀치보울의 진풍경은 제대로 봤으니 아쉬울 건 없습니다.

기실 이곳은 전망대에서 보는 풍경 하나면 거의 다 본 것이라 해도 됩니다.

한국의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지형입니다.

 

 

 

 

 

 

 

 

이곳은 시래기 산지로 유명합니다. 눈에 보이는 자드락 밭들은 거개가 무밭입니다.

무청만 잘라내 말려 팔고 무는 그대로 밭에 박혀 남아 있습니다. 주민들 대부분이 비닐하우스 덕장에 시래기를 말려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습니다. 인제 용대리의 황태덕장이나 상주의 곶감막 같은 것입니다.

저 많은 무가 그대로 버려지니 아까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기껏 잡아 올린 명태를 창난과 명란을 발라내고 정작 생선 몸통은 버리는 것과 한가지라는 생각이.

 

 

 

 

 

 

 

 

 

 

 

 

 

 

 

저녁해가 아닌데도 그림자가 깁니다.

바닥으로 내려오니 역시 바람 한줄기 없습니다. 해는 밤을 향해 기울어가는데도 몸은 오히려 더 푸근합니다.

 

계절의 끝자락에 와 진짜 겨울을 맛보았습니다.

점점 해는 길어지고 이제 겨울도 안녕입니다.

 

 

해안에는 모텔이 없어 20여분 걸리는 인제 서화로 내려왔지요.

여관이 몇 군데 있기에 촌동네에 많네,

했더니 웬걸

모텔마다 다 빈방이 없습니다. 주말도 아닌 평일인데.

과연 병영촌이라 그럴 거라 짐작을 했고.

그보다는 어 이게 아닌데 잠깐 당황했습니다. 설마 모텔방을 못 들어가리라는 예상을 안했어서.

그렇다면 거기서 다시 20여분 거리 되는 원통으로 더 나가야 했기에 그건 좀 번거로워 내키지 않았습니다. 

원통은 더 번화하고 모텔도 많긴 하지만 그 동네는 군부대도 더 많으니 거기도 역시 모텔이 붐비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으니.

그럼 또 인제까지 나가야 하니까.

 

그렇지만 다행히 몇 군데 허탕을 치고 네번째 찾은 모텔에 방이 몇 개 있어 기우로 끝났다지요.

 

 

 

 

캐더린 젠킨스 : Somewhere Over The Rainb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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